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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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리에 위치한 (주)오대양 공장에서 일어난 집단 자살 사건.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1939년생, 당시 48세)가 오대양이라는 사이비 종교와 기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교주 박순자는 광주 S여중, 대전 D여고를 졸업하였으며 학적부에는 「중간이하 성적의 말수적고 얌전한 학생」으로 기록돼 있다고 하며 1974년 횡격막에 병이 생겨 고통받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이 회복되는 일을 겪었다고 주장했으나 사이비 종교 특성상 거짓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어쨌든 박순자는 신 덕분에 병이 나았다고 믿었는지 신학교를 다니다가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했고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인 권신찬·유병언의 구원파에 출석하기도 했다.

박순자는 구원파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을 데리고 이탈하여 1984년 5월,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겸 회사인 오대양을 직접 만들었다. 참고로 오대양이라는 교명은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먼저 1984년에 민속공예품 제조사 오대양을 만든 뒤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민속 공예품 제조로 대통령상은 물론 88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로 지정되면서 회사의 명성은 커져 갔고 대전과 용인 등의 공장을 사들이면서 사업을 확장했으며 제조 사업 외에도 유치원, 양로원,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 사업을 하였는데 시설을 당시로선 최신식으로 꾸며 고아를 잘 키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대전에선 오대양의 평판이 아주 좋았고 박순자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자 여성의 워너비로 평판이 좋았다.

사실 박순자는 신도들의 자녀를 고아로 위장해 이들을 세뇌하여 아이들에게 "부모는 없고 너희는 고아이며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라고 가르쳤으며 심지어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소리도 공공연히 했다. 더불어 신도 및 그 자녀에게 공동생활을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을 사람답지 않게 통제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에게는 각방을 쓰게 하고 금욕 생활을 강요하며 외출도 금지했다. 2주에 한 번씩, 그것도 많은 사람들끼리 단체로 외출하는 것만 허용했고 외출 후에는 반드시 외출 시에 같이 나간 상대방의 바깥에서의 모든 행적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들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을 했더라구요. 처음에 애들이 와가지고 돈을 줘도, 애들이 돈을 쓸 줄도 모르고 뭐가 뭔지도 몰라요. 자기 어머니 보고는 '원예과 아줌마'라 부르고, 자기 아버지로 표현할 때는 '대리'라 그래요. 뭐 성을 붙여서 김대리면 김대리, 이대리면 이대리, 그런 식이더라고요. 도저히 이해가 잘 안 가고, 우리 애들이 나보고 아빠, 뭐 엄마 이러는 것도 우습게 쳐다봐요."
전직 서초경찰서 형사 이재문씨의 증언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반성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졌는데 이때 신도들은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토하고 규율을 어겼음이 드러나면 벌이라는 명목으로 가차 없이 집단구타를 당했다. 일례로 딸이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처벌한다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머니는 이것을 감사해하는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오대양 사건 이후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이미 사건 발생 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에게 살해된 뒤 암매장당했던 것까지 밝혀졌다.

박순자는 사채를 써서 엄청난 빚을 끌어모아서 용인에 공장을 세우고 공예품을 만들었으나 매출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직원들을 죄다 용인의 공장에서 합숙시켰다. 또 학사원의 원생이 대외적으로는 고아라고 선전했으나 실제로는 직원의 자녀였으며 양로원의 노인들도 대외적으로는 독거노인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직원의 부모였다. 박순자는 이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모 자식간을 의절해 버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십계명을 운운하면서 자식들로 하여금 부모를 구타하도록 시켰다.

굉장히 황당할 수도 있지만 신자와 그 자녀는 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자식에게 매를 맞는 부모는 이런 행위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여 매를 맞으면서 기뻐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박순자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므로 은혜롭게 죽었다고 선전했다.

이런 황당한 짓거리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오대양을 믿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박순자는 사채로 막대한 돈을 빌렸음에도 매우 높은 이자를 단 한 번도 연체하지 않고 꼬박꼬박 갚았다. 물론 이는 신도들에게서 걷은 헌금으로 갚은 것이며 신도나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30~40% 가량의 높은 이자를 포함하여 갚으면서 신뢰를 얻었다.
박순자는 표면적으로는 다수의 자선사업을 신경써서 운영하는 모범적인 기업인으로 비춰졌기에 때문에 무려 전두환 대통령의 표창, 그러니까 대통령상을 여러 개 수상했고 자치단체장상도 다수 받았다.
박순자는 이미 지역 유지 겸 자선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렇듯 박순자는 대외적으로는 대단히 인망 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오대양의 전성기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1986년 4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당시로선 대단한 거액인 7억 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사기를 당했고 사업은 실패했다.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명하고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에게도 돈을 빌려서 박순자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박순자가 신도들을 굴려 끌어모은 사채는 약 89억 원에 달했는데 갚지는 않고 사채만 끌어 쓰니 당연히 채권자에게 독촉과 사채 이자가 쌓여갔다.

그러다 1987년 8월 16일에 박순자에게 5억 원을 빌려준 이상배라는 사람이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려고 부인과 함께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구타당하다 못해 채권포기각서까지 강요받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들의 만행을 더 이상 참다 못한 다른 채권자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했으며 경찰은 사기 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했고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미 엄청난 사채 이자를 더는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박순자는 전 신도들과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80명과 함께 오대양 용인 공장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중 자신과 자녀들, 가장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모은 신도들을 합해 총 32명만을 골라 식당 천장에 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장 창고 안의 구석 공간에 4일 동안 숨겼다.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영자는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서 숨져 있는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 이기정에게 알렸다. 이후 박순자의 남편 이기정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에 신고해 집단 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과 담당 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의 상황은 단순히 참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넘어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다. 왜냐면 천장 위에 있던 빈 공간에는 코와 입이 휴지로 채워져 있었고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을 하고 있던 시신이 각각 이불을 쌓아 놓은 것처럼 각각 19명, 12명씩 쌓여 있었으며 그 먼 곳에는 공장장인 이경수가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법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 정리 중 사망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으며 이 메모와 부검을 통해 추정한 사망 시각은 발견 전날과 발견 당일이었다.

메모 내용과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말 못할 상황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당했거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음독하고 죽은 것으로 추측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 모든 시신은 경부 압박으로 인한 교살이 사망 원인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 교살로 인한 저항 흔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메모지 뒷면에는 메모에 대한 답변을 이경수가 작성했는데 다음과 같다.
반대다. 완전 도전이다. 넘기면 개발비 불게 하는 거다.
모두 나를 팔았기 때문이다. 절대 입 닫아라.
이미 의식 없으시다.
네 시간 전부터 다섯 명 정도 갔다.
너만이 깨물어라.
처음 계획하고 온 거다.
성령 인도로
너도 버텨라.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결국 경찰은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시키고 뒤이어 이경수가 김길환과 여자들을 교살시킨 뒤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하고 이경수가 교살된 시신을 2개의 더미로 나눠서 쌓아 놓은 뒤 마지막으로 이경수 스스로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자의적으로 한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쉽사리 죽을 수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고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이 천장 온도를 재 봤더니 70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게다가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천장 내부였다 보니 도피 기간인 4박 5일 동안 이미 신도들은 열사병과 탈수에 시달려 반쯤 혼수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저항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현장 감식 결과 식량이었던 쇠고기라면 5박스가 그대로 있었으며 김영자가 갖다 준 주먹밥도 20여개가 그냥 버려져 있었는데 이는 심한 탈수로 식욕마저 없어진 상태라는 뜻이었다. 특히 시체 중 교주 박순자의 시체의 부패가 제일 심했던 걸로 보아 박순자가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며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특성상 교주를 따라가고자 했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 더군다나 박순자가 도피 전에 신도들에게 돈을 최대한 끌어모아 바칠 것을 지시했던 탓에 가장 열성 신도였던 그들은 빚이 어마어마했다. 3~4억원 이상의 빚을 가진 경우가 절대다수였는데 당시는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억원, 은마아파트 1채가 3천만원에 월급을 100만원 받으면 잘번다, 부럽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현재와 비교해 보면 1인 당 10억 원 이상의 빚을 졌다는 얘기다. 거기다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해서 저 정도지 집값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몇 배 이상 커진다. 더불어 당시 일반 시중은행 이자(연 이율 10%대)로 갚아도 1년에 몇년치 급여를 내줘야 될 판인데 사채까지 대량으로 끌어모은 이상 아무리 열심히 과로해서 투잡, 쓰리잡 뛰어봤자 파산 신청은 확정적이었다.

즉, 일반인으로서는 갚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액수였다. 살아남아도 평생 빚쟁이로 사는 암울한 상황이었고 당시에는 파산 제도 등이 미비했음을 감안하면 이미 살 의지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렇게 믿고 따른 교주의 죽음과 빚쟁이로서 살아남아도 이도 저도 할 수조차 없다는 마음이 겹쳐 집단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며 사실 이것 외에는 이 비상식적인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당시 발견된 메모 중 매일 주먹밥을 갖다 준 김영자가 남긴 "이렇게 숨어있지만 말자. 사장님이 나서서 해결하면 모두가 나아질 것이다."라는 내용의 메모가 있었다고 한다. 김영자는 주먹밥과 함께 이 메모를 박순자에게 전달하려고 식당 천장을 계속해서 노크했는데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이경수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나타나 그녀에게 화를 냈다. 이때는 이미 이경수가 박순자의 지시를 받아 천장에 숨은 이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시신들은 부검 후 발견 이틀만에 화장됐다.

하나 사망자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지만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왜 자살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난 바가 없었던지라 경찰 당국은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 수배했다. 결국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되었고 검찰 수사 결과 1987년의 경찰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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