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우양파크빌 놀이터에서 오후 3시 30분경 명학초등학교 2학년 우예슬 양과 같은 학교 4학년 이혜진 양이 친구들과 헤어진 후 실종되었다가 다음 해인 2008년 3월 11일 이 양, 3월 19일 우 양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 3월 17일에 용의자 정성현이 검거되어 용의자의 이름을 따 '정성현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명 공개수배 방영 당시 사라진 크리스마스라는 부제로 소개되었다.
피살자 이혜진 양(당시 10세)과 우예슬 양(당시 8세).
실종 당일 오후 3시 30분 경 이 양과 우 양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헤어졌으며 16시 10분경 안양문예회관 앞 야외 공연장 CCTV에서 포착되었다. 이들은 오후 5시경 안양문예회관 인근 상가 주인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익일 오전 0시 30분경 두 어린이의 가족이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하면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TV 방송이나 뉴스, 버스정류장 화면에서 앰버 경보를 했는데 12월 25일부터 2008년 3월 초까지 했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가 나타난 이후 목격자와 제보가 전혀 없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12월 31일 공개수사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과가 없자 2008년 1월 8일에 신고보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건은 사실상 2달 동안 공백이 되었다.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 수사가 부실하고 비합리적이었다는 수사 관계자의 내부 고백이 있었다.
3월 6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원점에서 재수사를 지시함에 따라 재수사는 시작되었고 그 결과 3월 11일 오후 4시 경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호매실IC 칠보산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에 의해 암매장된 여아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었다. 실종 77일 만이었다. 3월 13일 국과수의 DNA 검사결과 시신은 이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이 양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우 양의 생존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다음날에는 경찰이 이 양의 에서 13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던 정성현이 사건 당일 동안구 관양동 렌터카 회사에서 뉴 EF 쏘나타를 빌렸다가 그 다음날에 반납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해당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채취하였다. 이틀 후, 혈흔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 양과 이 양이란 것이 드러나면서 두 어린이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일 오후 9시 25분경에는 충청남도 보령시의 어머니의 에서 있던 용의자 정성현을 검거하였다. 정성현은 검거 당시에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억울하다는 식의 말만 되풀이하였다.
이후 정성현은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했다"고 말하며 진술을 번복했다.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하자 3월 17일 낮 12시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 상태였던 우 양을 시화호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오이도에 묻었다고 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아무튼 3월 18일 정성현은 영장이 발부되었고 7시간 후 정성현이 사체를 유기했다고 지목한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전우회 한 회원이 오후 4시 43분경 군자천 군자7교에서 군자8교 사이 제2간선 수로에서 어린이의 시신이 돌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오후 6시경 상류쪽으로 1㎞쯤 떨어진 군자6교와 군자7교 사이에서 시신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오후 6시 30경에는 군자5교 인근에서도 찾아냈다. 실종 88일 만이다. 3월 19일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3월 24일 오전 7시 50분경 시화호 군자천 주변 갯벌 지역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 역시 치아 구조와 DNA 분석 결과 우 양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성현은 이 양의 시신은 토막낸 후 야산에 한 곳에 매장했지만 우 양의 시신은 군자천에 버리는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진 것이다.
시신이 이미 발견되었던 이 양은 3월 17일 안양의 메트로병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다음날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우 양의 경우 시신 대부분이 발견되었지만 상반신 몸통 일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 장례식이 늦어졌다. 부모는 ‘시화호 물을 다 퍼서라도 예슬이 몸을 다 찾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4월 17일 오전 6시 50분경 관이 안양 메트로병원을 나와 모교인 명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모교에서 추모 속에 오전 8시 40분경 화장터인 경기 수원 연화장으로 가서 화장되었다.
정성현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마스에 정성현은 새벽 대리운전을 마치고 아침부터 대학교 선배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생맥주를 2000cc 마셨다고.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급기야 비닐봉지에 본드 흡입까지 했다고 한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정성현은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때마침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머니 선물을 사고 귀가하던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을 발견한 정성현은 아이들을 위협하여 자기 으로 끌고 가 성추행한 후 성폭행을 시도했고 이에 반항하던 아이들을 제압하고 모두 처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심하게 훼손했다. 그리고 나서는 태연하게 중국에 음식을 시켜 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성현은 시신 훼손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시신의 발목부터 무릎, 허벅지 순으로 잘라냈다. 정성현은 이혜진 양의 시신을 빨간색 플라스틱 통에 담아 렌트한 차량(ef 쏘나타) 트렁크에 싣고 수원시 권선구 인근에 야산, 그리고 근처 하천으로 가 암매장하였다. 12월 26일 새벽 4시쯤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우예슬 양의 시신을 아까와는 달리 시흥시 군자천에 유기하였다. 그리고 정성현은 아침이 밝아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를 찾아가 태연히 컴퓨터를 고쳐줬고 오후 3시 쯤에는 렌터카를 반납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8일 후 2008년 3월 11일, 수원시 권선구에서 훈련 중이던 예비군이 여아의 시신 머리부분이 땅 밖으로 노출된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시신은 30cm 깊이로 암매장되어 있었고 무려 열 토막으로 잘려 있었으며 일부 신체 부위에서 톱 자국이 발견되었다.
국과수의 DNA 검사 결과 위에 서술한 대로 시신은 이혜진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혜진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시신 상태로 미뤄 보았을 때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정확한 사인과 사망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혜진 양은 1남 2녀 중 막내딸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찰은 살인범 정성현이 사건 당일(25일) 렌트카 회사에서 차량을 빌린 후 다음 날(26일) 반납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두 어린이와 자동차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발견했다.
경찰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정성현은 25일 크리스마스에 안에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해당 렌트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확보해 혈흔의 DNA 감식 결과 두 어린이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2008년 3월 16일, 정성현을 충남 보령의 정성현의 어머니 에서 검거했다.
정성현은 체포 후 수사 과정에도 계속된 거짓말과 허위 진술로 수사당국의 혼선을 유발했다. 그중 대표적인 거짓말이 두 어린이를 차로 치어 죽게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정성현은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하였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을 주자 3월 17일 낮 12시에 위와 같은 내용의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 상태였던 우예슬 양을 시화호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오이도에 묻었다고 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그 뒤 3월 18일 군자천에서 우예슬양의 토막 시체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3월 19일 수원지법은 정성현을 구속한 뒤 3월 22일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3월 24일, 공사장 인부 김모씨에 의해 우예슬 양의 머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우예슬 양의 몸통 윗부분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유족들은 우예슬 양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따라서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예슬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예슬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정성현은 유년기에 아버지로부터 폭력과 학대를 당하였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친구들로부터 단따돌림을 당하여 고등학교도 적응하지 못하였다(한국 현행교육법상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에 해당).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여성들로부터 원인 모를 배신감과 혐오증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범행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후 안양시의 한 자취방에서 은둔하며 지냈던 정성현은 사건 당일 크리스마스 예배 후 두 초등학생들에게 접근하여 자기네 에 아픈 강아지를 돌봐 달라고 자신의 으로 유인하여 성추행을 하려다 저항하자 살해 후 시신을 토막 내어 각각 호매실IC 인근 야산에 암매장하고 시흥 군자천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정성현은 사망한 두 초등학생과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웃 아저씨였으며 평소 안면이 있었다. 따라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만드는 사건 중 하나로 경찰도 이 사건이 부실수사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후 정성현은 2009년 2월 26일을 기하여 사형을 최종적으로 확정받았고, 사형 행이 사실상 모라토리엄 상태라 실질적으로는 가석방 없는 무기금고형을 받으며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