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 仁川廣域市 , Incheon Metropolita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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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의 "○""川", 파도를 모티브로 끊임없는 움직임과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 • 항만, 공항을 중심으로 상품, 서비스, 정보가 들어오고 나가는 교류 도시의 표상 • 세계의 관문도시로서 동북아의 중심지, 동북아의 Hub로서 21C 인천의 미래상을 표현

 

삼국시대에는 온조의 형인 비류가 터를 잡은 곳으로 알려져있는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로 불리다 (미추홀구, 비류대로, 매소홀로 지명의 시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통일 신라의 9주 5소경에 편입되어 한산주 율목군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다. 이후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漢化)정책에 따라 소성현(邵城縣)이 되었다.

소래포구가 당나라 소정방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인천 이씨 가문에서 7명의 왕비를 배출하면서 경원군, 인주 (원인재역이 인천이씨 묘소에서 명칭 되었다) 그래서 SBS 드라마 '시티홀'에 나오는 인천을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 이름도 '인주시'다. 인주시의 특산물 중 하나는 밴댕이인데, 실제로 강화도의 특산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과는 전혀 상관없다. 경원부로 계속하여 승격되었다. 그래서 인천 이씨의 그 유명한 별칭이 경원 이씨.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인주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 시절에 군현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인주가 다시 경기도 인천군(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이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인천(仁川)이란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루원시티가 있는 가정동 명칭이 조선 개국공신 조반의 별장이 있다고해서 이 명칭이 되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1883년 일본이 강제로 개항시킨후 구한말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개화의 도시인데, 인천항은 서울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로 일본인, 청나라인, 서양인들을 비롯한 많은 국적의 외국인의 왕래가 잦았다. 현재도 인천 개항장 인근에 적산가옥(일본식 건축물), 차이나타운과, 구한말 서양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서양 문물 중 대표적인 것이 야구와 축구 같은 스포츠 종목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도 이래서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종합대학인 인하대학교가 한국계 미국인 하와이 동포들의 독립운동성금으로 설립되었기에 인하대의 교명이 각각 인천의 지명 앞글자 인(仁)과 하와이의 지명 앞글자 하(荷)를 따서 인하대(仁荷大)로 지어졌다.

그러나 조선을 두고 다투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는데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인천(제물포)에서 전투가 있었다.

6.25 전쟁 때에는 낙동강까지 밀려나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한국을 구해낸 인천상륙작전의 주무대였다.

인천 서구에 콜롬비아 UN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수봉공원에 UN 참전 기념탑이 있다.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있다.

실미도 사건, 대청해전, 연평도 포격전이 있었다.

기존 도심은 중구·동구 및 남구 용현동, 숭의동, 도화동 일대였으나, 1985년 중구 관동에 있던 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옮겨가면서 구월동과 간석동, 관교동, 주안동이 새로운 도심으로 떠올랐다.

1989년 경기도로부터 계양면과 영종도·용유도를 편입했고, 1995년 강화군 및 옹진군, 검단을 새로 편입하면서 시역이 확장되었다. 이때 경기도에서 유인도 39개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관할 해역이 위도 1도 · 경도 2도에 달하게 되었고 경기만의 대부분이 인천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광역시 출범 당시 초안에는 강화, 옹진군 외에 김포군 전역과 시흥시 북부(옛 소래읍 지역)까지 편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만 주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으면서 이들 지역만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강화군의 경우 전쟁사와 관련이 깊은데 고려 여몽전쟁 시기 잠시 수도가 된 바 있고, 조선 때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방어전이 있었으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겪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성정부의 수립 발표, 인천 5.3 항쟁이 있었다.

인천을 칭하는 단어로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미추홀(彌鄒忽)이다. 미추홀의 홀(忽)은 고구려와 백제의 특징적인 지명어로서, 한자어 '성(城)'으로 쓰인다. 따라서 미추홀을 미추성으로 바꾸어 표기해도 무방한데, 실제로 광개토대왕릉비의 제2면 1행에 '미추성(彌鄒城)'이라는 표기가 나온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A] 彌鄒城 …[B]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A] 미추성 …[B] 을 공격하여 취하고 (후략)

이후 고구려는 이곳을 매소홀(買召忽)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미추홀(彌鄒忽)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며, 실제 발음은 'mit-kol/mi-kol'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기서 'mit'은 물(水)의 뜻을 가진 어휘로, 밑(本, 始, 底), 뭍(陸), 미르(龍), 믿-(信) 등의 다양한 어휘로 분화되는 어휘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제도에 따라 한산주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었으며, 매소홀현은 경덕왕 때 한화(漢化)정책에 따라 이름을 고쳐 소성현(邵城縣)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으로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인주(仁州)이다.
경원(慶原)이라고도 한다. 매소(買召)는 미추(彌鄒)로도 쓴다.

이후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 이씨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으며,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의 왕후를 배출한 지역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한 번 더 승격되었는데, 이는 공양왕이 신종을 매개로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다시 인주군(仁州郡)으로 강등되었고,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의 이름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어,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

인천을 한자로 仁(어질 인)과 川(내 천)으로 풀이하여,어진내로 순우리말화 할 수 있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다. 본디 '인종의 고을'이라는 뜻인 인주(仁州)에서 조선 태종 시기에 격하당해 주(州)에서 점을 세 개 뺀 인천(仁川)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에 억지 순우리말이며, 대구를 달구벌이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천광역시를 순우리말로 이를 때에는 가장 오래된 지명인 미추홀을 훨씬 더 많이 쓴다. 단, 인천광역시 전역을 미추홀로 칭할 때도 있지만, 미추홀구(舊 남구)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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