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날인 2012년 6월 30일에 연기군을 폐지하고 2012년 7월 1일에 설치됐다. 정부부처 대부분이 입주한 정부세종청사가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다.
동으로는 충청남도 공주시, 서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남으로는 대전광역시, 북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접한다.
세종특별자치시청 공식사이트에 따르면 도시의 명칭은 세종대왕에서 따왔다고 한다. 명칭이 정해진건 2006년 12월이다. 2006년 3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된 도시명칭 제정을 위한 국민공모에서 2,163:1의 경쟁을 뚫고 '세종'이 뽑혔으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의 위원장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는 2006년 12월 21일 전체 회의를 개최해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도시명칭을 '세종'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지역번호도 따로 부여됐다. 충청남도(041), 대전광역시는 042, 충청북도(043), 세종시는 044다. 영업용 차량 및 건설기계 번호판도 충북 xxY xxxx[A] 또는 충남 xxY xxxx[A]를 돌려쓰지 않고 세종 xxY xxxx로 따로 배정받고 여전히 지역명칭이 들어가는 오토바이 번호판도 세종만 붙는다.(건설기계번호판은 2022년 11월 26일부터 전국번호로 변경)
세종특별자치시는 대표적인 행정도시로 2010년에 민간기관, 2012년부터 정부기관이 차례로 이전되어 2014년까지 이전이 완료됐다. 2018년에는 행정안전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의 추가이전이 추진됐다.
2021년 기준 45개의 중앙행정기관과 소속기관들이 있으며 15개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포함한 20개 공공기관이 세종으로 이전했다. 또한 국무총리 관저도 설치됐고 실제로 국무총리가 산다. 그러나 아직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의 과거 집무실을 폐쇄하지는 않았다.
충청북도였던 부강면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원래 충청남도였던 곳이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전신도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간주하며 세종특별자치시청, 세종특별자치시교육청 분리 준비 절차도 각각 충청남도청, 충청남도교육청 소관이었다. 그렇다 보니 충북보다는 대전 및 충남과 동질성이 크다. 세종시 출범 이후 가장 사용례가 많은 게 대전세종충남(대전충남세종)이며 이외 대전세종, 세종충남(충남세종)이 있다. 물론 세종충북(충북세종)도 있기는 하다.
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의 일원이었다. 오늘날 대평동이 주요 중심지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강역이었으며 전의면 일대는 대목악군(大木岳郡)에 속한 구지현(仇知縣)이었고 연기면 일대는 일모산군(一牟山郡)에 속한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다. 4세기 초중반 경 백제의 직접 지배령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청주, 공주 등 기존 토착 세력은 백제 왕실과 꽤 타협이 잘 이뤄졌는지 백제 직접 지배기에도 꽤 우대받은 듯 하지만, 세종시 대평동 세력만은 여력은 유지하지만 크게 쇠락한다. 그리고 그 전까진 대평동 세력보다 뒤쳐졌던 나성동, 새롬동 세력들이 자리잡았던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다. 백제가 중앙의 힘을 기울여 일부러 대장간 시설 및 공공시설들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일한 전문가 집단 및 금강을 통제하는 행정인력 등을 주로 배치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백제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흡사 오늘날 세종시처럼 새롬-나성동 일대에 일종의 특수 행정타운을 만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 수도 위례성이 공함된 후 고구려군이 남하해 이 일대도 지배하였고, 그 과정에서 백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새롬-나성동 일대의 행정타운 또한 고구려가 통째로 접수해 고구려 군지휘부로 잘 활용하면서 나성동으로부터 불과 20km도 안 되는 웅진성은 크나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부강면, 청주, 대전 서부의 월평동에도 고구려 군지휘부가 있었으니 세종시 전체가 적어도 장수왕 시절에는 고구려 영역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동성왕 때쯤에야 백제가 세종, 대전 일대의 고구려 군대들을 몰아내고 수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왕(백제)대 개편한 지방구획인 5방 기준으로는 세종 일대는 북방에 속했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9주 5소경이 설치되며 구지현과 두잉지현은 웅천주에 속했으며 이후 경덕왕의 한화정책으로 구지현은 대목악군이 개칭된 대록군(大麓郡)에 속한 금지현(金地縣)으로, 두잉지현은 일모산군이 개칭된 연산군(燕山郡)에 속한 연기현(燕岐縣)으로 개칭되면서 웅주에 속하게 된다.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에는 900년대 초반 태봉이 점유한다. 918년 태조(고려) 왕건이 집권하고 고려를 세우자 공주, 세종, 청주 일대 호족들이 후백제에게 귀부하여 후백제 영역이 되지만, 934년에 고려가 수복하였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오가는 패턴이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금지현은 전의현(全義縣)으로 개칭되고 연기현은 그대로 이어진다. 현종(고려)대 설치된 5도 양계 기준으로 둘 다 양광도에 속했으며 청주목에 속한 속현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양광도가 충청도가 되어 충청도에 속했다. 이후 19세기가 되며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할되면서 충청남도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대한제국: 구한말에는 충청남도 전의군(全義郡), 연기군(燕岐郡)으로 승격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부군면 통폐합으로 연기군으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충청남도 연기군이 대한민국의 행정수도 이전으로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청남도에서 분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