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똥통 사건, 만화 검열제, 합동출판사에 이어 한국 만화를 궤멸시킨 흑역사이자 높으신 분들의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을 한순간에 떨어뜨린 사건.
1972년 1월 31일 오후 5시 15분경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살던 정병섭(鄭炳燮, 당시 나이 12세, 신설동국민학교 6학년)이 목을 매어 숨졌는데 그가 자살한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누나의 증언을 근거로 정부와 언론은 만화를 사건의 원인으로 낙인찍었는데, 사회구조적 문제인 아버지의 실직과 이에 따른 생활고 등은 일체 언급도 없이 만화만을 원인으로 몰고 간 것이다. 2월 1일자 동아일보의 첫 보도에 이어 다음날 2일에는 모든 신문이 사설과 해설기사 등을 동원해 불량만화의 발본색원을 주문했다. 경향신문 2월 2일자 6면에 실린 <동심 좀먹는 만화공해>에선 아래와 같이 만화방을 우범지대로 묘사했다.
또 서울신문 역시 이날 해설기사에서 "3평짜리 좁은 방 안, 희미한 형광등, 탁한 공기, 그 속에 20여 명의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1권에 5원 짜리 만화들을 본다. 마음껏 뛰어놀 것이 없는 도심지 어린이들에겐 이 5원 짜리 만화가게가 꿈을 기르는 오락장소, 그러나 이들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는 거의가 건전한 꿈을 길러주기보다는 허황되고 모험심만 자극하는 것들."이라고 만화방과 만화의 내용을 깎아내렸으며 "정 군은 장비가 죽었다 살아나는 <철인 삼국지>나 괴물들이 불사신처럼 죽었다 살았다 하는 <괴상한 집>을 즐겨보고 흉내를 냈다고 가족들은 말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죽음의 원인을 만화로 돌렸다.
그리고 이날 동아일보는 사설 <불량만화가 빚은 비극>을 통해 "어린이들이 깜짝 놀랄 거친 의음어를 서슴지 않고 쓰는 것도 어쩌면 이런 류의 불량만화 탓이라 할 수가 있고, 어린이들이 겁도 없이 위험한 장난을 곧잘 하며, 들었을 때 얼굴이 붉어지거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유행어 등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것도 불량만화에서 얼마간은 익히고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이런 불량만화가 나도는 것을 모른 체하고 또 철없는 어린이들을 그러한 불량만화의 해독에다 무작정 내맡겨 둘 것인가."라고 만화의 단속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들 신문기사를 보면 하나같이 한 어린이가 죽은 원인을 그 어린이가 즐겨보던 만화에서 찾았고 만화가게가 어린이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 문제라고 보았으며 이같은 불량만화 문제를 적극 해결하기 위해 출판물의 심의를 철저히 하고 저질 출판물을 단속하라는 주문을 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론몰이는 정부와 사회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어졌다. 정병섭 군이 다니던 신설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학교별로 궐기대회를 벌여 '절대로 만화 가게에 가지 않는다', '만화 보는 돈으로 어린이 저금을 한다'는 등의 결의문 아래 만화책을 모아 놓고 불태웠다. 이에 한국부인회와 서울의 만화방 업자들도 이와 같은 캠페인을 벌였으며 심지어 애니메이션 또한 MBC의 《뽀빠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영되었다. 1972년 2월 5일 매일경제 기사
가뜩이나 도서윤리위의 '아동만화윤리실천요강'을 위시한 만화 검열제로 소재가 제한되었던 데다 이 사건 이전에도 '만화는 어린이에게 유해한 악서(惡書)'라는 주제의 관변 단체 궐기대회가 열려 만화 분서 퍼포먼스도 종종 벌어지고 사회적 위상이 안 좋아졌고 합동의 독점 체제로 질적 저하까지 겹치던 만화계에 정병섭의 자살은 대파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은 시내 만화방 517개를 수색하여 '불량만화' 라고 분류한 20,440여 권을 수거해 불태웠으며, 10원 내지 20원을 받고 TV를 보여주거나 떡볶이 등의 음식물을 판매한 만화방 주인들은 공연법 위반 내지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총 70여 명이 즉심에 넘겨졌다. 이때 만화방 중 104개소를 즉심에 회부하고 194개소에 경고, 219개소에 훈방처분을 내렸다. 만화 창작과 관련된 69명이 고발 조치되었고 대한민국의 58개의 만화 출판사 중 절반 이상이 등록 취소되었으며 심지어 만화방을 정리하고 쌀집을 운영하던 사람도 아이들의 증언에 의해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8년 수필가 양미림의 <만화시비> 이후 문학계에 의해 줄기차게 이어졌던 만화에 대한 비판은 이후 사회 전체에 파급되어 한국인이 만화에 대해 피상적으로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이 제대로 쐐기를 박았다. 박정희 사망 6개월 전인 1979년 4월에는 불량만화를 팔면 형사처벌한다는 조항(제2조 2항 1호 및 제6조 2항)을 추가한 미성년자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박정희 사후인 12월 28일에 이를 제정/시행했고,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 9월에 '만화정화방안'을 마련하여 11월에는 국무총리 직속기구 사회정화위원회가 불량만화를 판 출판업자 14명을 구속했으며, 이 시기에 문화공보부는 사회정화위원회의 방침대로 만화방, 서점, 소매상 등을 일제 수색하여 불량만화 총 395종 28,261권을 적발하고 출판사 19개의 등록을 취소한 데 이어 만화가 69명을 검찰 등 당국에 고발한 바 있었다.
이 사건 이후 5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은 크게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어린이용 프로그램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고, 21세기 들어 학습만화나 웹툰 등으로 활로를 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게다가 이 사건이 한국의 만화 산업 외에 애니메이션 방영에서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한 심의가 쓸데없이 엄격해지는 데 한몫했다. 1980년 8월부터 한국방송협회가 내놓은 '방송자율정화방안'의 일환으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이 시행되어 SF 애니메이션이 편성에서 퇴출되어 1981년 <은하철도 999> 이전까지 명랑 애니메이션으로 도배된 적이 있었지만 애니메이션 및 비디오와 관련한 각종 자정 활동이 진행되면서 199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어느 정도 활로를 되찾았으나 만화든 애니든 미국과 일본에 판권료 갖다바치는 판권 셔틀 행태는 21세기에도 여전하며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 애니 제작업계가 일본 및 서구권 작품을 만들어 주는 하청제작 위주로 돌아간 것도 그러하다. 다만 이는 인식의 문제도 있었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 애니를 수입하는 게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는 데다 광고료에 비해 제작비가 비싸다 보니 수지타산에 잘 맞지 않아 저랬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1990년대까지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적용하지 않았던 것도 한 몫한다.
이로 인해 "정병섭과 그걸 부추긴 정병섭의 누나"는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심지어 규제가 대폭 완화된 후에도 만화가를 장래희망으로 둔 사람들에게 고인드립을 당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만화 등 픽션의 설정을 잘못 따라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정병섭 군 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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