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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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NL 학생들의 시위에서 김세진과 이재호가 분신한 사건.

당시에는 교련이 교육과정에 남아 있었는데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생들은 2학년이 되면 필수과목으로 '전방입소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훈련은 학생들을 군부대로 불러 모아 약 일주일 간의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생들이 군부대에 가서 군대 예비체험을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강했다. 먼저 운동권 학생들은 전방입소훈련을 미제국주의의 용병교육이라고 여기면서 강하게 반발했고 일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들의 반발도 상당했다. 그래서 1986년부터는 전방입소훈련에 반대하고 그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중에는 '반미자주화운동'이 있었는데 이 경향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빠르게 퍼졌다. 19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여 새롭게 운동권이 된 사람들은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파생된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 등을 통하여 반미 성향이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80년대 학생운동에서 '반미'라는 것은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다. 다만 처음에는 반미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반미' 정서는 점점 짙어졌다.

1986년 초 성균관대학교의 학생들이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서울대학교의 운동권 조직들은 자신들도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서울대학교도 곧 전방입소훈련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6년 4월 16일 '전방입소훈련전면거부 및 한반도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부위원장에 이재호를 선출했다. 이 단체는 결성되자마자 곧바로 시위를 계획했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전방입소를 거부하는 내용의 홍보를 진행하고 홍보지나 책자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들의 활약으로 서울대의 각 과들과 단과대학들은 서로 전방입소를 반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고무된 전방입소거부특위는 4월 28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할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학교 측이 4월 28일부터 3일 간의 도서관 휴관을 공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로구 연건캠퍼스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정했고 거사일도 전방입소 전날인 27일로 정하고 지도부는 김세진과 이재호로 정했다. 그러나 두번째 계획도 정보가 노출되어 도서관 앞에 경찰이 진을 치는 바람에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두번째 계획까지 무산되자 그 날 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또 다른 농성 장소를 물색해야 했는데 오랜 토론 끝에 학교와 가까운 신림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이정승은 신림사거리에 대하여 "신림 사거리는 전에도 가끔 가두투쟁 장소로 활용됐었죠. 의대 도서관 농성이 불발로 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기 때문에 다시 시내에서 집회를 잡기에는 무리였어요. 학교와의 근접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시위 날짜는 4월 28일로 정해졌고 세번째 계획의 지도부는 두번째 계획과 동일하게 김세진과 이재호였다.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가 계획되어 있었던 400여명의 85학번 학생들이 가야쇼핑센터 부근에서부터 신림사거리까지 도로를 점거해 연좌한 채로 시위에 나섰다. 신림사거리 근처의 서강빌딩에는 김세진과 이재호가 올라가 있었는데 여기서 둘은 학생들의 시위를 선도하면서 핸드마이크로 전방입소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유인물을 뿌리면서 "반적반핵 양키 고 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도 둘을 따라서 구호를 복창하면서 시위했다.

몇 분 후 경찰이 들이닥쳐 거리를 차지한 학생들을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끌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 있었던 건물에까지 경찰이 올라오자 김세진과 이재호는 가지고 온 시너를 온 몸에 뿌리고 경고했다.
"시위대에게 덤벼들지 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압작전을 계속 펼치면서 둘에게 다가왔다. 마침내 김세진과 이재호가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켜면서 온 몸에 불이 붙었는데 이재호는 불타는 채로 옥상에서 추락했고 김세진은 옥상 바닥에 쓰러졌다. 둘을 잡으러 온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모두 그 분신을 목격했다. 그렇게 둘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인문대학 학생회장 이정승이 대신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들은 김세진과 이재호를 생각하며 구호를 외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경찰에 연행되던 와중에도 한동안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온 몸이 숯덩이가 된 채 김세진과 이재호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김세진은 전신의 60%에, 이재호는 전신의 8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둘은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서로를 걱정했다고 한다. 김세진은 5월 3일에, 이재호는 5월 26일에 각각 사망했는데 둘 다 23살의 청년이었다. 둘의 장례식은 그 해 5월 30일에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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