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사건.
대통령직 퇴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재임시절 측근들이 연이어 구속되면서, 검찰의 수사를 앞둔 상황에 놓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먼저 박연차에게 받은 15억은 이자율 7%, 차용기간 2008년 3월 ~ 2009년 3월로 명시되어 있는 차용증을 써 주고 받은 것이라 사안간의 거래로 판단돼 죄를 묻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리되었고 강금원이 노무현에게 전달한 70억은 창신섬유 이사회에서 회의 후 후원격으로 건넨 것이며 건넨 시점도 퇴임 이후이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강금원의 횡령 및 탈세 사건을 수사하던 대전지검은 이 돈을 회사에서 횡령한 것으로 판단해 사법처리하였다. 당시 강금원은 뇌종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밝히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스스로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병보석이 허락되었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버렸고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노무현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였고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 모르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권양숙도 박 회장한테서 받은 10억과 현금 3억원을 모두 자신이 전달받았다고 인정했으며 이후에도 박연차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전달한 1억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이 권 여사에게 돌아간 정황이 드러나 다시 수사를 진행했다.
이 상황에서 박연차는 4월 검찰의 수사에서 “500만 달러를 연철호에게 송금하기 이전에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전에 협의를 했었다”고 진술하여 당초 퇴임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는 노무현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곧바로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검찰 수사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박연차는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아내가 돈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구차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했다며 “나는 아내가 받은 줄 몰랐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 진술이 나온 후 검찰은 다음주 내로 노무현 내외를 불러 수사하기로 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두환 다음으로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1시 20분경부터 11시 20분경까지 2008년 12월 연철호를 통해 박연차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500만 달러, 2007년 6월 정상문을 통해 권양숙이 받은 100만 달러, 그리고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의 특수 활동비에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노무현에게 이런 돈의 흐름을 재임 기간에 알고 있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체로 '모른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2007년 6월 말 박연차가 권양숙에 전달한 100만 달러 중 일부로 의심되는 30만 달러가 금융정보분석원의 외화송금 거래내역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와 딸 노정연에게 송금되었는데 이 사실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알고 있었느냐고 추궁했으나 이 사실도 '전혀 몰랐다'며 부인했다. 11시경 검찰이 박연차의 대질을 추진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검찰은 30만 달러의 출처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의 일부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권양숙을 비공개로 다시 소환 조사하기로 했다.
언론들은 참여정부가 내건 최대 무기였던 도덕적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주변 참모들의 연이은 비리 소식과 구속, 노건평의 이권 개입, 정치자금 주선과 노무현도 시인한 아내의 뇌물 수수로 인해 청렴과 깨끗한 정치를 내걸던 참여정부의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보도했으며 많은 국민들도 무능해도 도덕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참여정부 인사들의 연이은 비리 의혹으로 인해 큰 실망감을 표했다.
여담으로 박연차는 당시 검찰에서 박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정치권 인사와 관료에게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털어놓으라'면서 당사자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상대방이 박연차 회장과의 금품 수수를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관계없이 박연차가 대질 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그대로 유지한 점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검찰의 공소 유지에 청신호가 된다"고 전했으며 "이 진술이 법정에서도 일관되면 노무현에게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월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때 이인규 중수부장 주도로 홍만표, 우병우 등이 합류하였다.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후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논두렁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홍만표와 우병우는 비리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갔고 이인규는 모 기업의 채용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국정원 관련 수사가 시작되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를 노무현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이인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모든 게 끝나면 제대로 된 당시의 사실을 밝히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인규는 세월이 흘러 2019년 8월에 미국에서 돌아온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귀국 후에는 서울 자택에 머물고 있다.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은 2009년 5월 13일에 SBS가 단독 리포트로 내보낸 기사가 출처다. 이 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준 명품 시계를 받아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유시민은 이후에 "노무현이 시계의 존재를 알게 되어 권양숙에게 화를 내며 망치로 깼다고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 방송에서 발언했다. 결론적으로는 논두렁에 버린 것이 아니라 망치로 깨 버렸다는 것이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박연차로부터 시계를 받은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2015년에는 검찰에 따르면 2009년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이끌던 ‘노무현 수사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전부터 국정원 측과 정면 충돌했다고 한다.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및 명품시계 여론전 등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2017년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 직원 4명이 ‘논두렁 보도’ 직전인 2009년 4월 하금열 당시 SBS 사장과 접촉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보도를 적극 요청하고 주장했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물이 2009년 5월 13일 단독으로 내보낸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라고 한다. 해당 과정에서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 등 신병 처리에 치중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수사팀이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후 임채진 전 검찰총장에게 구속 기소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의 분위기도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구속된 형사범들과 다르게 불구속으로 처리할 이유가 없다"였다. 한 관계자는 "6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한다면 앞으로 남은 수사에서 1억 ~ 2억 원 씩 받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어떻게 구속하자고 할 것이냐"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임채진 총장과 검찰 원로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불구속 기소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말 바꾸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7년 12월 연철호가 박연차에게 500만 달러 투자를 부탁했고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버진아일랜드에 다음 해 1월에 타나도인베스트먼트라는 창투사를 설립해 다음 달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직전 홍콩 계좌로 돈을 송금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실을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면서 알게 됐다"며 "투자이고 하니까 그냥 정상적 거래로 봐서 별 문제가 안되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담당 검사(중수1과장)였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 수사를 강하게 주장했다고 밝혔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차피 재판으로 가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실형을 받을 텐데 구속되면 본인이 한 걸로 여론몰이가 될까 부담을 느꼈다."며 "구속시키지 말라고 검찰 수뇌부에 전달했는데 우병우가 버텼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병우 전 수석이 버티는 바람에 안타까운 죽음이 일어났다.", "이 죽음이 엄청난 촛불집회로 이어졌으니 MB 입장에서는 우병우가 얼마나 밉겠냐?"며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사장으로 승진되지 못하고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된 이유를 설명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데이저널이 보도한 윤석열 대통령의 녹취록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노무현을 잡으려고 박연차를 잡겠다고 한 것인데 박연차가 그것을 알고 구속돼 가지고 송치돼 오자마자, 구속되자마자 (대검) 중수부에 영장이 딱 떨어지니까 ‘나 노무현에게 돈 줬다’고 했잖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검에서 수사 초기에) ‘야 이거 어렵다’고 미적대니까 중수부장, 수사기획관 싹 바꿔버린 것 아니냐”며 “이명박 정부 최대 패착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수사 초기인 2009년 1월 중수부장은 박용석 중수부장에서 이인규 기조부장으로, 수사기획관도 최재경에서 홍만표로 교체되었다. 윤석열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009년 8월까지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지냈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2011년에 노정연의 위법 혐의를 조사한 대검찰청 중수부 검사가 바로 윤석열이었으며 노무현의 사위 곽상언을 조사한 검사도 윤석열이었다. , ,
당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6%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였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2%,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5%에 달한 것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여론은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나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을 하루 앞둔 2009년 4월 29일 2009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곳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곳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제서야 부정적인 국민 여론을 인식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늦추면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의 전언에 의하면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재보궐선거 참패 뒤에 악화된 국민 여론을 인식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심지어 청와대조차도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불구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도 불구속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조차 불구속을 주장하였고, 대부분의 검사장들도 불구속을 주장하였으나 수사를 전담하던 이인규, 우병우, 홍만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수사를 강력히 주장하고 버티면서 사태는 더욱 난항으로 빠져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 두고 사저 뒷산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했다. 이후 경호 차량(은색 현대 그랜저 TG)에 실려 진영읍에 있는 당시 세영병원(현 진영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자그마한 시골 병원 특성상 수술이 불가능하여 다시 경호원들의 그랜저 차량으로 인근의 대형병원인 양산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도착 후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원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화장하여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수원시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된 후 봉하마을 내 묘역에 안장되었다. 향년 62세.
자살 직후 김경한 전 법무부장관은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으로 안다(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의 수사 종결)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이 자진 사표를 냈고 법무부장관 사표는 반려되었지만 검찰총장은 받아들여졌다. 사건은 추가적인 심문 및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발표하고 내사 종결로 마무리되었다.
죽음이 알려지자 각계 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켜본 뒤 검찰동우회 소식지에 '수사십결'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팀의 수사 행태를 비판하였다. 실명으로만 작성 가능한 대검찰청의 '국민의 소리' 게시판조차 검찰에 대한 비판으로 도배될 정도였다., 2, 3, 4 '검사님의 속사정'이란 책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어느 검찰간부는 당시 수사팀이 검사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으며 무리한 수사를 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전직 대통령은 다 허물이 있는데도 손도 못 대면서 봉하마을에 내려간 힘없는 노무현만 잡아 족치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고 검찰을 질타했다. 하지만 홍준표의 이 같은 발언은 검찰의 수사 절차에 대한 비판이며 홍준표는 "노무현, 뇌물먹고 자살했다는 것은 막말 아닌 팩트"라고 발언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2009년 6월 12일에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발표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급격히 불타오른 여론을 의식해 검찰은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을 고려했으나 언론의 반발을 의식해 공개 진행으로 선회하며 여론을 정면 돌파할 의지를 보였다. 박연차 수사 결과 발표에서 검찰은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증거관계 설명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공개될 참고인들의 사생활과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높"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증거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박연차 전 회장의 640만달러 공여혐의부분도 추가 기소하지 않고 내사종결(입건유예)했다. 검찰은 “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해 안타깝고 애통하게 생각한다”면서도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며 수사 기록은 영구히 보존되고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노무현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이 자기변명과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변호인단의 문재인 전 변호사는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훗날 문재인 측에서 이인규를 비판하며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 검찰 측에서는 그러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하였으며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혼란스러운 행태로 인해 검찰은 또 다시 비난받았다.
검찰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15년 2월 당시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는 당시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그 진실의 일부분을 밝혔는데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는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를 밀어붙이던 검사 3인방의 운명도 주목받았다. 홍만표 전 수사기획관은 법조사상 최대비리인 정운호 게이트에 연루되어 2018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불구속을 요구한 국민 여론도 무시하며 구속을 밀어붙이던 우병우 전 중수1과장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어 한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우병우 문서 참고. 이인규 당시 수사팀장은 모기업의 인사청탁 의혹 등에 연루되었고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발족하기에 앞서 문재인 당선과 함께 재직 중이던 법무법인에서 해고되었고 미국으로 날아가 장기간 체류했다가 2019년 8월에 귀국한 후 서울특별시의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노무현의 저주'란 말이 떠돌기도 하였다.
노무현 본인이 뇌물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진보 진영 측은 2017년에 국정원의 비리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으로 간첩 잡으라고 국민들이 혈세로 제공한 대북공작금까지 유용하며 노무현에 대한 뒷조사를 벌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러고도 뇌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세간에 내놓지 않았던 것을 보면 노무현 본인은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만약 노무현이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법으로 다투지 않고 자살을 선택했는가?"라는 반문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 이에 대해 반박하는 측은 이명박 전 대통령 등 다른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봐도 소환 후 일주일 안에 영장을 청구하고 이후 기소를 한 반면 노무현에 대해서는 소환 후 3주가 지나도 영장을 청구하지도 기소하지도 무혐의 처분하지도 못한 채 국정원과 손잡고 보도자료나 돌리는 등 당시의 수사 행태가 도저히 법으로 다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변호인으로 검찰 수사에 전해철과 같이 들어갔던 문재인 전 변호사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검찰이 제시한 근거는 박연차의 진술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영장을 청구하지는 못할 것이고 불구속 기소를 해도 도저히 유죄 판결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병우의 친구라는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해 우병우가 자신한테 "정황상 의심이 가는 거지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국가정보원,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비롯하여 공직자윤리실과 경찰청 등의 기관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을 불법으로 사찰하는 등 모두가 노무현 하나를 위해 총동원되었다. 국정원 불법 사찰 사건 등 참조.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노무현이 자주 가던 삼계탕집인 토속촌마저 세무조사에 들어갔을 정도였으며 주변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와 피의사실공표 등은 너무 잦았다. 실례로 노무현이 정계 입문은커녕 사법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다녔던 성당의 송기인 신부는 당시 식당 가서 밥 사먹은 영수증까지 털릴 정도였으며 그의 좌장인 안희정은 집에 계좌 추적했다는 검찰의 통지서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면서 어떻게 소나기가 노무현 주변에만 내릴 수 있냐고 말할 정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즉, 대체로 몰리는 결론을 요약하자면 가족이나 측근들이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본인이 직접 범죄를 주도했는지의 여부가 맞냐에는 의문이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내와 측근들의 도덕적 문제는 확실하지만 이들의 문제에 관여해 범죄의 선을 넘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고 당시 권력기관들의 표적 세무조사나 사찰, 수사 과정에서의 피의사실공표 등의 모욕주기 행태는 너무 심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이것 때문에 이명박과 검찰은 노무현의 곁을 따르던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진들과 노무현의 옛 동지, 추종자들에게 단단히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는 당시 한나라당 사람들에게도 좀 너무하다고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홍준표와 박희태가 비판할 정도였으며 진영을 막론하고 이건 사람 하나 잡으려고 전 국가기관이 나서 그를 난도질한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