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9일 강원도(現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사무곡 오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사건 자체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지만 당시 워낙 유명하면서도 서민적인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이라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영자 씨(당시 19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사무곡'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 캐기만으로 살아가던 산골 소녀였다.
그러던 이영자 씨와 그녀의 아버지는 1999년 대한민국의 시골과 오지를 전문적으로 촬영하던 불교 신자인 사진작가 이지누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2000년 7월 KBS 2TV 인간극장 '그 산 속에 영자가 산다(5부작)'를 통해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초등학교를 1주일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그녀를 위해 수많은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이영자 씨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초등과정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유명세를 통해 이동통신회사인 LG텔레콤의 광고 영상까지 찍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인간극장의 인기는 최고점에 이르게 되면서 훈훈하게 이 에피소드는 끝나는 듯했다.
여기서 화면 속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은 이후의 사건을 예측한 걸지도. 방송을 본 사람들은 기억나겠지만 영자의 아버지는 프로그램 내내 영자가 산골에서 나가는 걸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때문에 영자가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투덜대거나 속상해서 울기도 했고 제작진들이 나서서 "딸의 인생을 망칠 일 있냐"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살인 사건이 발생 직후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이라며 영자가 울었다는 소문도 인터넷에 잠시 돌았다.
이영자 씨가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2001년 2월 12일 그의 아버지가 산골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영자씨의 큰아버지가 동생의 산골집에 방문했다가,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발견당시 문이 부서져있었고, 방안에 피가 뿌려졌는데도 경찰은 대충 시신을 눈으로 살펴보고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는 부실수사의 극치를 보인다. 검찰도 단순 병사로 사건을 마무리 한다. 이영자씨가 아버지 시신에 수의를 입히기 위해 시신을 닦던 중, 시신 왼쪽 쇄골에 깊은 상처를 발견한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항의에 경찰은 시신은 국과수에 보내 부검을 했고, 살인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재수사를 한다. 그리고 2001년 3월 13일 범인 양재동(당시 53)이 용의자로 구속되었다. 당시 기사
양재동은 다수의 절도 및 강도 행각으로 당시 전과 7범이었으며 29년 동안, 그러니까 무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로 외딴 농장 전문털이범이었다.
양재동은 경찰 조사에서 지난해 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이영자 부녀의 TV 프로그램과 통신사 광고를 보고 부녀가 돈이 많을 거라 생각하여 출소 후 2차례 답사를 통해 이영자 씨의 아버지가 산속 깊숙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행이 용이하다는 점을 파악한 후 CF 출연료와 후원금을 노리고 2001년 2월 9일 오후 11시 20분경 이영자 씨의 아버지가 거주하던 자택의 방문을 부수고 침입해 돈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정작 이영자 씨의 아버지는 10만 원권 수표 1장을 포함해 수중에 단돈 12만 4천 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양재동은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나 노래방에 수표를 쓰다 경찰의 추적에 걸려 붙잡혔다. 양재동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도소로 보내서 세상물정에 어두워, 어리석게도 10만원짜리 수표는 추적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001년 2월 27일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영자 씨의 후원회장이 이영자 씨의 출연료와 인세를 횡령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영자 씨는 서울로 올라온 후 후견인에게 돈을 강탈당하고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당해 왔다. 후원회장의 아내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남편 잘했는데 왜 가두냐"는 망언을 했다가 거리에서 사람들의 야유와 욕설을 들었다.
이 두 사건 이후 이영자 씨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속세를 떠나 인근 모 산사로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는 주변 친지에게만 이 사실을 전했는데 각종 언론사에서 "영자가 사라졌다"며 그녀의 행방을 취재하다가 절에 들어갔음을 확인한 것이다. 훗날 절에 처음 찾아온 그를 돌봐 주었던 혜설스님은 "절에 처음 찾아왔을 때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피까지 토했으며,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자구책으로 여신도들만 있는 ○○사로 몰래 옮겼다. 이때 언론에서는 '영자가 실종됐다'면서 끊임없는 관심을 표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건은 다시 발생했다. 2001년 7월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라는 추모 시집이 발간되었는데 책을 낸 신풍출판사에서는 이전부터 이영자 씨의 아버지와 같이 시집을 낼 준비를 했으며 갑작스레 세상을 뜬 고인과 이영자 씨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책을 냈다고 했다. 기사 하지만 이 시집이 이영자 씨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이영자 씨의 동의 없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당사자가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책이 출간되긴 했으나 이미 그러한 소문이 퍼져서인지 판매는 저조했으며 신풍출판사는 이후 폐업했다.
이후 한동안 대한민국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가해졌다. '산골에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 부녀를 억지로 도시에 끌어내어 결국 비극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건 이 부녀를 오직 돈으로 여긴 광고주와 인간극장 제작진들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진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으며 '대한민국 국민은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홍스구락부 제작자였던 조문홍은 자신이 제작한 '산골소녀 영자' CF 패러디를 홍스구락부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사건 이후에도 홈페이지에 '영자' 버튼이 남아 있었지만 그냥 놔뒀다가는 고인드립이 될 게 뻔하므로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가진 않는다.
속세를 떠난 이영자 씨는 '도혜'라는 법명을 얻고 승려가 되어 고향 강원도의 한 암자에서 수행하는 삶을 택했다.
출가 이후에도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빌린 일부 언론들이 이영자 씨를 찾으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2007년 초에 한 여학생이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한 후 유명세를 얻으면서 악플과 괴소문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제2의 영자 사건이라며 일간스포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암자에 출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반장 스님이 "도혜스님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지금 너무나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파합니다. 도혜스님의 출가 전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스님들도 몇 안 되니, 그냥 돌아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내보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득달같이 다른 암자에 이영자 씨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그 암자에 취재하러 갔다가 암자의 주지인 노스님이 "악귀같은 것들, 사람을 두 번 죽이려 드느냐! 썩 꺼져라" 라며 분노를 담아 호통을 치고, 다른 스님이 "왜 그렇게 가만히 계시는 스님을 못 건드려서 안달이죠? 계속 이러면 우리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 얼씬거리지 말라" 라는 항의를 하자, 그제야 물러났다고 한다.
2012년 한 월간지에서 이영자 씨의 친척을 찾아갔는데 그들도 비구니가 된 이영자 씨의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이 기사에 따르면 영자가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해마다 세금으로 15,000원 정도가 나오며 그냥 친척들이 부담하며 집도 관리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영자에게 집의 소유권이 이전되었지만 과연 돌아올지 모르겠다, 친척들도 고통에 시달리니까 더는 얼씬거리지도 말라." 라고 통보했다.
범인 양재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자신을 죽여 달라며 항소하기도 했다. 다만 이 항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검찰 측의 항소만 받아들여졌다. 피고인이 스스로 형량을 높이기 위한 항소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골 소녀 영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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