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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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서 증산도 신도 3명이 증산도 행정실장의 지시를 받고 前 증산교 본부 종령이자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구 예산농업전문대학) 교수인 홍성렬과 그 부인을 살해한 사건. 결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며, 내막을 알려면 무려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강일순 계통 종교들에서 벌어진 내분의 뿌리를 살펴야 한다.

증산계통 종교의 교조 증산 강일순(1871~1909)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큰 교단을 만든 이는 단연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300~500만 신도를 헤아렸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당시인구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보천교 간부 중 이상호ㆍ이정립이라는 형제 신앙인이 있었다. 이상호는 한학에 밝았고 이정립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보천교에서는 처음에는 강일순을 천사(天師)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고 개벽을 기다리며 도통을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심지어 교주 차경석조차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차경석은 옛 스승이자 교조인 강증산을 기만적인 도인이라 생각하여 배제하고, 자기 아버지 차치구를 옥황상제로 모시며 교리와 의례를 유교화하여 보천교를 새로운 종교로 바꾸려고 하였다. 당시 보천교 고위간부였던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는 이에 반발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켰으나, 차경석의 대응에 위협을 느끼고 만주로 피신하였다. 1936년에 차경석이 숨을 거두자 다시 국내로 들어와 강일순의 3번째 부인 고판례를 모시고 동화교를 개교했다.
한편 충청도 서산 지역의 부호로서 안병욱이라는 보천교 신자가 있었다. 안병욱의 장남 안세찬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증산을 신앙하는 가풍 속에서 자란다. 안세찬의 회고에 따르면, 12세 때 '홀연히 영성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고 자신이 강증산의 뜻을 이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일제 치하였던 당시 안세찬은 징용을 피해 집을 나와 중국 및 만주 등지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았다고 한다.
한편 이상호ㆍ이정립은 고판례와도 사이가 틀어져 결별한다. 이 무렵 안세찬은 해방을 맞아 자신과 함께 종교사업을 같이 할 동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두 형제와 접촉하였다.

그렇게 이상호·이정립과 안세찬은 함께 '대법사 증산교'를 개교한다. 대법사 증산교의 중심간부들은 오행에 따라 토주土主ㆍ 금주金主ㆍ 수주水主ㆍ 목주木主ㆍ 화주火主라 이름 붙인 5명이었는데, 이상호는 토주, 이정립은 목주, 안세찬은 수주였다. 불과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안세찬이 핵심 5인방에 들었음은 대법사 증산교에서 안세찬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뜻이다. 교단 창립 직후 대법사 증산교는 의통제작에 착수하는데, 의통이란 다음과 같다.
강일순은 생전 자신의 사후 대병겁 창궐을 경고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 대병겁은 세균병, 바이러스병이 아니라 신장(神將)이 인간의 혼을 뽑아가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병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의통인패(醫統印牌)라는 신물 한 벌을 남몰래 제자 박공우에게 전수하며 무진戊辰년 동지冬至에 기두起頭하며 묻는 자에게 전하라고 명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무진년 동지에 기두하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의통인패 한 벌을 전하라, 그가 세상을 구원할 자니라.”라고 했다. 그리고 박공우가 무진년 동지에 만난 이가 바로 이상호다. 박공우는 이상호가 바로 십수년 전에 스승 강일순이 자신에게 말한 '무진년에 기두하는 자'라고 짐작했고, 이상호에게 의통인패를 전했다고 한다. 증산계통 종교문헌을 추적해 본다면 이상호는 의통을 전수받았을 확률이 높다. 이상호는 개벽이 곧 목전이라고 생각하여 위하여 자기가 아는 의통제작법을 안세찬 등 교내 간부들에게 전수했다. 이때 의통제작에 필요한 경면주사 등은 부호의 아들이었던 안세찬이 상당수 부담했다고 한다.
그렇게 교세를 확장해 나가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법사 증산교 지도부는 6.25 전쟁이 강증산이 예고한 개벽이 드디어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의통인패 등을 배부하였다. 그러나 전쟁만 있고 병겁이 없음을 보고 뒤늦게 개벽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증산교 지도부는 안세찬 쪽에 분배했던 의통인패 및 호신의통, 호부의통을 회수하고자 했지만 안세찬은 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6.25 전쟁을 계기로 이상호 형제와 안세찬은 서로 결별한다. 이후 이상호가 1966년에 사망하자 동생 이정립이 교주직을 승계받아 죽을 때까지 증산교의 교주로 지내다가 1968년에 사망한다. 이정립이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후배 신앙인이 바로 본 사건의 피해자 홍성렬이다. 이상호ㆍ이정립 형제가 모두 사망하자 안세찬은 증산교를 찾아와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대전에서 독자적으로 교단을 창교했으니 현재의 증산도이다.

증산교와 증산도는 그 뿌리가 같기에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얼어붙은 계기가 홍성렬의 '범증산교사(1994, 범증산교연구원)' 출간이었다. '범증산교사'는 강증산 사후 강증산의 친딸이 세운 교단(증산법종교),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등이 세운 교단(미륵불교, 문공신 교단, 안내성 교단 등등...)의 역사를 홍성렬이 직접 답사를 해가며 자료를 수집해 펴낸 역작이다. 그런데 안세찬, 안중건의 증산도에 대해서는 목차를 제일 뒤에 배치했고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와 안세찬이 만났을 당시,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나고 20여 년 후 안세찬이 다시 증산교를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는 그간 안세찬ㆍ안중건 부자가 증산도 신도들에게 말했던 내용과 크게 달랐다. “범증산교사”의 증산도사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2.운산(雲山) 대법사(大法社) 간부와 불화(不和)

대법사(大法社)는 신묘(辛卯 1951)년 음력 2월에 원평 장승백이에서 호신부(護身符)와 인패를 만들 때 인육(印肉)의 제조에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15근을 운산이 자기의 연원(淵源)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공주(公州) 부여(夫餘)지방에서 거출하여 냈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의 책임을 맡아 자긍(自肯)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운산이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配付)와 의통구호단의 인원배정(人員配定)을 자기의 연비(連臂)에 유리하도록 짠데다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 갔으므로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같은 이는 '충청도 사람만 사람이냐 만일 안세찬(安世燦)연비의 의통구호단이 경상도에 내려오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고 분개했다.

당시 지방별로 많은 교인을 거느린 대연원주격(大淵源主格)인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 배동찬(裵東燦), 경기도의 원제철(元濟喆) 유흥고(柳興?), 충청도의 김종렬(金鍾烈)등은 운산(雲山)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대립하게 되자 운산(雲山)은 자기가 많은 교인을 포교하여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의통인패의 제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의통구호단을 조직해 놓으니 이 공로는 인정해 주지 않고 교주 청음과 남주는 자기에게 대드는 두령들 편을 들어 자기를 몰아 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교본부(敎本部)에서 박복만(朴福萬)을 시켜 자기를 해치려 했다고 까지 항의하게 되었으니 운산(雲山)이 청음(靑陰) 남주(南舟)밑에서 교(敎)를 함께 신봉할 수 없게 되어 신묘(辛卯 1951년)년 가을에 대법사(大法社)를 떠났다. 이로써 운산은 을유(乙酉 1945)년 9월 19일 대법사 창립에 참가한 이후 6년여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대법사을 나온 운산은 공주군(公州郡) 유구(維鳩)에서 직조기(織造機)를 놓고 인조견사(人造絹紗)를 을미(乙未 1955)년까지 짰다. 병申 (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大田市) 중동(中洞)으로 이사하여 상업(商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는 한의술(漢醫術)로 자녀의 학비를 보탰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면서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늬 사람과 다른 가정교육을 시켰다.

3. 운산의 용화동(龍簧) 재출입(再出入)과 연원논쟁(淵源論爭)

운산은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를 떠나 교단과 외면한채 은둔(隱遁)생활을 하고 있다가 23년만에 다시 나와 증산교인과 접촉한 것은 갑인(甲寅1974)년 봄이었다.

운산이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전에 자기의 연원지역(淵源地域)으로 생각되는 충남(忠南)의 아산(牙山) 서산(瑞山) 예산(禮山)등지에 가서 한말 가운데 대법사 창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을 비난하고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장절(章節)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 말은 전에 대법사(大法社)에 다니던 교인들로서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자기가 대법사 창립에 참가하여 종교활동을 할때 청음(淸陰) 남주(南舟)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8.15광복후 대법사를 창립할 때의 운산의 처지는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8.15광복후 대법사창립에 참가한 운산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22일생인 24세의 청년이었고 청음은 무자(戊子 1888)년 2월 27일생으로 57세요 남주는 을미(乙未 1895)년 2월 19일생으로 50세였으니 운산에 있어서 청음, 남주는 부집(父執)의 존장(尊長)이었다.

더욱이 청음, 남주 두분은 보천교(普天敎)의 방주(方主)였었고 보천교를 나와서는 대성(大聖)의 성훈(聖訓)과 성적(聖蹟)을 찾고 엮어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여 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동화교(東華敎)를 세웠다가 계미(癸未 1943)년 8월에 체포되어 8.15광복후에 출옥한 교계(敎界)의 중진(重鎭)이었으니 연령으로 보나 신앙의 열력(閱歷)으로 보나 운산과 청음,남주 두 분이 평등한 동지적(同志的)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지며 대순전경의 상당한 부분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의 권위(權威)까지 허물고 무엇을 가지고 종교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의 종교적 양식(良識)을 의심하게 되었다.

운산이 과거에 자기의 연비가 많았다고하는 증산교의 아산지부와 서산지부의 월례회에 참석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증산교 대법사(甑山敎大法社)는 연원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교인을 말하기를 '운산이 20여년전에 자식을 낳아서 팽개쳤다가 그 자식이 천신만고끝에 성장하여 사람 구실을 겨우 하게 되니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비니 나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운산이 청음, 남주의 인격을 격하(格下)하고 자기의 연원주(淵源主)가 종도(從徒) 이치복(李致福)이라고 하면서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에 크게 반발한 것이었다. '운산이 23년전 포교할 때 교인들에세 청음, 남주를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 했지 우리 보고 언제 이치복(李致福)을 따라 증산대성을 믿으라 했느냐 엄밀하게 말하면 23년전의 운산은 용화동 청음, 남주 앞으로 교인을 인도한 지로사(指路使)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운산이 자신의 연원주가 청음, 남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청음,남주를 연원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23년간 교단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연비교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그대들의 연원주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종교운동을 하자고 하는 것은 그가 그간 수도해서 고덕대현(高德大賢)이 되었을 지라도 하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옛 연비되는 교인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여 일을 하자 했어야 옳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의론이 분분하면서도 몇몇 교인들은 옛 정을 생각하여 대전시 대사동에 있는 운산의 집을 오갔지만 아산 서산지방의 교인들과 운산과의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10월 초순에 용화동을 방문하여 원로교인들이 있는 사석(私席)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했으나 공감(共感)을 얻지 못했고 박기백(朴耆伯)같은 이는 운산의 주장이 경위를 가리지 못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병진(丙辰 1976)년 동지(冬至)전날밤 교인 2백여명이 모인 도방(道房)에서 운산은 발언할 기회를 얻어 이제까지 가슴속에 품어온 신념과 울울한 심사를 장시간 피력하였는데 이 때 말한 얘기 가운데에도 교단을 초기부터 지켜온 도인들이 들을 때 긍정(肯定)하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교단을 떠날 때 그 때 간부들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했는데 이제 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연원회의를 열고 세 다섯의 사정위원을 뽑아 교인들의 자격을 새로 부여해야 합니다. 내가 이 단체의 매듭을 지려고 왔습니다. 교판은 연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대자연의 질서가 도덕이요 우주정신이 도덕률(道德律)이므로 체천측지(體天則地)한 우리 인사(人事)도 도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근원도 도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판은 연원주를 타도하고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쥐려고 하니 교단이 망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연원주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내가 내 공로를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젊은 청춘을 다 받쳐 많은 사람을 포교해 놓은 것은 누가 쌀거두어 먹으라고 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연원을 따지자면 이치복(李致福)씨 연원입니다. 나는 청음선생과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불초 안세찬이 고약한 마음이 있다면 벼락을 맞게 해주십시오. 내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지만 내가 이룬 단체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나는 부모처자를 돌보지 않고 포교하여 많은 교인을 모으니 박복만이 같은 사람은 나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나쁩니다. 동지끼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끝에 가서 출교명령(黜敎命令)을 받았습니다. 단체라는 것은 운영의 묘(妙)가 있어야 합니다.“

위 글은 그 당시 운산(雲山)이 말한 긴 이야기의 초록(抄錄)가운데에서 일부를 발췌(拔萃)한 것이기 때문에 운산(雲山)의 소신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어떤 주장이 교단을 지켜온 교인들을 긴장케 하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운산의 말을 들은 원로 교인들은 그가 피력한 이야기들의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운산이 창교주(創敎主)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과 불화(不和)하고 교단의 간부들과 대립하여 떠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논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였고 '이제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했는데 자기야 말로 출교명령을 받아 나가서 20년 이상을 도장에 왕래하지 않은 사람이 교인대중을 어떻게 보고 교단이 망했느니 사표를 내라느니 할 수 있느냐. 신앙을 꾸준히 하다가도 5년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 다시 입교식을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통례(通例)로 되어있다.

이런 통례로 본다면 아니 이런 교단의 통례를 구태어 들지 않고 일반 상식으로 봐도 안세찬은 교인대중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안세찬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없고 무엇이 씌어대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연원주없는 교단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라고 한 말은 증산대성(甑山大聖) 다음에는 청음, 남주 두분을 하늘처럼 믿고 입교한 교인들에게 '안세찬 내가 청음, 남주 밑에서 포교하고 일은 했지만 나는 연원을 따지면 이치복씨 연원이니 20년전에 나에게 도를 받은 이나 그 연비들은 나를 연원주로 받들어 일을 하자' 고 하면 그 말을 누가 옳게 보겠는가]라 하였다.

운산(雲山)은 그 뒤 몇 차례 용화동에 와서 같은 내용의 발언을 여러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했으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 중건(重建)을 시켜 색다른 교리강좌를 하다가 제지 당하였으며 연비교인들을 무례하다고 꾸짖다가 충돌하여 폭언이 오고가니 이로부터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아산(牙山) 서산(瑞山) 공주(公州)지방의 교인으로 운산(雲山)과 인연이 깊어 그를 동정하는 몇몇 교인들은 그가 20여년 후에 다시 도장에 나왔더라도 겸허하게 지금까지 교단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여러 원로교인들과 상의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의향을 밝혔으면 용화동에 다니는 옛 교인들의 호감을 사서 뜻밖에 교권을 쉽게 장악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운산(雲山)이 오랫동안 은거하였다가 다시 용화동에 나가서 옛 연비와 손을 잡고 새로운 종교 활동을 전개하려다가 신념의 차이로 좌절(挫折)하자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 범증산교사 증산도사 -

범증산교사 출간을 계기로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안세찬ㆍ안중건 부자는 홍성렬을 두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곤 했다. 안중건의 설교 중 일부는 증산도 발간 월간지 “증산도 문화소식”지 1999년 10월에 개재되었다. 공식지라서 최대한 순화한 표현임을 알아두자. 저작권 보호를 위해 스캔본은 생략하고 16년 후 플래카드 재판 판결문에서 인용한 부분만 알아보자.
난법은 역사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 뿌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 제 3변 도운에도 난법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증산도는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다. 잘 알다시피 증산도에 대해 크고작은 흠집내기, 상처내기를 일삼고, 증산도의 도통맥과 도의 연원과 뿌리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더욱이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증산도에서 도를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성렬 김탁 같은 자다. (중략) 홍성렬(1935년 생, 65 세)은 『범증산교사』 등의 책자를 통해 가장 집요하고 악랄하게 상제님 도정 집행을 방해하는 훼도자라 할 수 있다.
대전지법2014고정661 판결문 11p

그런데 홍성열이 범증산교사를 출간한 이후 서울에서 신원 미상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한다. 아카이브 훗날 증산도 신도들에게 살해당한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테러도 증산도 신도들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미제사건으로 남은 지 9년 후인 2010년 초, 대한민국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개발한 첨단 지문감식기법을 적용해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을 입력해 보았다.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통해 쪽지문을 보이지 않는 융선 부분을 추정, 복원했더니 일치율이 가장 높은 지문은 역시 살인범 이○○의 것이었다. 드디어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이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2010년 3월 16일, 경기도 안성의 한 PC방에서 담배를 피고 나가는 이○○의 재떨이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해보니 살인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동일인임이 밝혀졌다. 경찰은 이○○을 체포해 관련증거를 제시해 추궁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고 공범 장○○, 심○○도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2010년 4월 13일, 예산경찰서는 홍성렬 살해사건의 용의자 3명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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