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낮 12시쯤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여우고개 6부 능선 부근 계곡을 지나던 등산객이 담요로 가려진 백골 사체 2구와 심하게 파손된 대우 누비라 승용차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알려진 사건. 매체에 따라 사건 발생 지역을 따서 "포천 자매 살인사건", "포천 자매 백골 시신 사건"이라고 보도한 곳도 있다.
경찰은 번호판 추적을 통해 차량의 소유주가 10개월 전인 2011년 2월 16일에 고양시 일산동구에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가족과 함께 자살을 암시하는 유서를 남기고 가족과 함께 실종된 이진호(당시 45세)임이 밝혀졌고 백골 사체는 그의 두 딸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관할 경찰서가 아닌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도 행적을 쫓고 있었다.
형사들은 수사가 진행되자마자 곧바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족이 동반자살했다면 4구의 시신이 나와야 하는데 발견된 것은 2구의 유골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촬영을 위해 현장을 분석한 전문가는 차가 주행 중에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절벽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속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발견된 차량이 여기저기 긁힌 것으로 보아 절벽 위에서부터 천천히 굴러 떨어졌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시신은 튕겨져 나와 발견 위치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었다.
그렇다면 이진호와 아내 정 씨(당시 36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현장에서 발견된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유서에는 부부가 근처 산정호수에서 죽을 거란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만 부부의 흔적은 호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서를 쓴 2주 뒤 뜻밖에도 경기도 의정부시의 한 병원에서 부부가 같이 동상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고 이에 경찰은 이진호와 아내를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로 전국에 공개 수배했다.
상술된 유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네요.
죽으려 시도했는데 그도 여의치 않네요.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을 방치시킬 수가 없어
용기를 내어봅니다.
우리는 산정호수에 빠져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오늘 2월 22일 화요일이네요.
벌써... 이 곳의 위치를 알리고
우리 아이들의 시신이 잘 거두어지길 바라면서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22일-
백골 사체 발견 2년 뒤인 2013년 4월 10일에 거동이 수상한 남녀가 있다는 주민의 신고로 부산의 한 과수원에서 이진호와 아내가 경찰에 검거됐으며 동년 9월에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살인죄를 인정받아 각각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는데 특별사면이나 가석방 등 감형이 없었다면 2023년 4월 9일 출소하였을 것이다.
이진호의 아내 정 씨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학습지 판매원으로 일했는데 팀장이 되기 위해 빚을 내 가면서 무리하게 학습지 판매를 강행하다가 2010년 9월 이런 방식을 회사에 들켜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결국 1억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견디다 못 한 아내는 이진호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하고 이진호는 이를 받아들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진호의 가족이 얹혀 살던 이진호의 누나가 살던 집도 월세가 밀려 어려운 처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2011년 2월 14일에 가족여행을 명목으로 딸들을 데리고 나와 포천시의 민박집에서 숙박한 이진호와 아내 정 씨는 자녀가 잠들자 번개탄을 피워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진호는 가족들과 집을 나선 후 오후 5시쯤에 포천시 이동면 백운계곡에 위치한 어떤 민박집의 3호실에 투숙하게 되는데, 두 딸을 일찍 재우고 난 뒤에 이진호는 밤새도록 아내를 설득했으나 아내는 자살 의지가 확고했으며 설득에 실패한 이진호는 차라리 아내를 따라 죽겠다며 체념했다.
다음 날 오후 1시 20분쯤 이진호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21만 원을 입금받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유서를 쓰려고 편지지와 편지봉투와 볼펜 한 자루를 사서 민박집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두 딸은 영문도 모른 채 방 안에서 놀고 있었는데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 안에서 이진호와 아내는 유서를 써내려갔다.
아내 정 씨의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
잠시 후 저희 손으로 아이들 목을 졸라야 합니다.
이런 부모가 또 있을까요?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모든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진호가 매형에게 쓴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남아서 천덕꾸러기가 될 것 같아 저희가 데려갑니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죽을 각오로 잘 살아보려 했는데 현실은 너무 무섭습니다.
어제도 결정을 해서 행동으로 옮기려 했으나 아이들의 눈이 밟혀 못했습니다.
오후 5시 즈음에 이진호는 이동우체국에서 우표를 사서 두 장의 유서를 우체통에 넣고 밤 11시쯤에 다시 투숙하였고 이진호는 자던 중에 살며시 일어나서 민박집의 주방 가스레인지와 연결되어 있는 LPG 가스통의 호스를 칼로 반쯤 자른 뒤에 밖으로 나가 고기를 구워 먹겠다는 구실로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받은 번개탄 2장에 불을 붙이고 주방 안에 있던 냄비에 넣었다. 이때 정 씨가 말 없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내 딸이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던 중에 번개탄이 들어있는 냄비를 밟고 넘어지자 우당탕 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 번개탄이 건들어짐을 눈치챈 이진호는 환기를 시킨답시고 창문을 열고는 번개탄을 창 밖으로 던졌다.
그 다음날 오전 11시에 민박집을 나온 이진호의 가족은 일동면 화대리 부근 제일유황온천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아점을 먹었는데 주차장으로 나온 정 씨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죽기로 했으니 너희들은 보육원에 보내주겠다”며 처음으로 죽음을 암시했다. 큰딸은 울면서 따라 죽겠다고 했고 작은 딸은 울기만 했다.
오후 6시 쯤에 이진호는 지인에게 빌린 돈 15만 원을 근처 농협에서 찾아 산정호숫가에 있는 한 숙박업소로 이동했다. 길가에 있는 마트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각각 2병 사고 번개탄을 3장 구입했고 2월 16일 새벽 2시 쯤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다독여 차에 태우고 호숫가 공터에 차를 세운 후 불붙은 번개탄 3장을 냄비에 담아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정 씨의 다리 밑에 놓았는데 잠을 청한 지 2시간 쯤 지난 새벽 4시에 두 딸이 괴로워하면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하자 이진호는 딸들이 있는 뒷자리로 넘어가 작은딸부터 목을 조르고 정 씨는 발버둥치는 아이들 다리를 잡았다. 결국 두 딸은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이진호와 아내는 깨어난 두 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후 자신들도 죽을 마음으로 차를 몰아 여우고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 충격으로 자매의 시신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지만 이진호와 아내는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맨 채 절벽 아래로 차량을 몰았고 절벽 20m 지점에서 차량이 나무에 걸려 충격이 완화되어 세 번째 자살 시도도 실패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자 이진호는 돌로 아내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를 순차적으로 내려쳤지만 죽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자 이진호와 아내는 영하의 날씨에 저체온증으로 동사하기 위해 옷을 벗기까지 했으나 역시 죽진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기절한 후 깨어났다.
다섯 번에 걸친 자살 시도가 전부 무위에 그치자 이진호와 아내는 그때서야 생존을 선택했다. 이진호와 아내는 지인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동상과 머리의 상처를 치료한 후 검거 전까지 2년 동안 진천, 강릉, 밀양, 부산 등에서 일용직 근로 생활을 하면서 숨어 지내는 삶을 살다가 부산 기장에서 검거되었다. 당시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거주하던 A씨(당시 52세)가 업무차 인근 농협을 찾았다가 이진호가 수배 전단에 있음을 봤는데 자신의 집 근처 농장에서 이진호가 일하는 걸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하여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이진호는 2023년 4월 9일에 만기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