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 大田廣域市 , Daejeon Metropolita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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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의 휘장. 대전의 '大'와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는 국토의 중심, 교통의 요충지임을 이미지화

 

대한민국의 광역시다. 남한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다섯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회덕현, 진잠현의 두 소읍과 공주목의 일부로 구성된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회덕군과 진잠군을 통합하고 공주군에서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현 대전광역시의 전신인 대전군이 지금과 같은 구획으로 신설되었다. 순우리말 이름은 비수리(계족산만 해당), 한밭, 큰밭이고 한밭이 대전과 같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순우리말/지명 문서 참조.

충청도 제1의 도시로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대덕연구개발특구(대덕연구단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조성된 한국 최대이자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과학·연구도시다. 또한 4년제 대학만 13곳이 소재한 교육도시다.

그와 동시에 정부대전청사와 다수의 국가기관 본사가 자리한 행정도시이며 3군 본부와 인접해 있고, 국군의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설이 밀집한 자운대와 육군군수사령부, 국방과학연구소 등이 자리해 군사도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철도로 가장 수혜를 많이 본 도시다. 철도 하나 덕분에 시골 깡촌에서 한국 6대 광역시 중 한 곳까지 발전한 도시다. 대전조차장역의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 분기는 훗날 경제발전기에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의 분기로 이어졌고 남한의 중앙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각종 국가적 시혜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대전의 유명 관광 명소인 성심당도 대전역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고속철도 분기는 오송이 가져갔지만 아직도 서대전역 경유 호남선 KTX가 상당수 운영하고 있어 철도의 분기점이라는 위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한국철도공사와 국가철도공단과 그 외 자회사들의 본사가 대전에 있어서 관련 사진에 철도기관 공동사옥, KTX가 꼭 들어간다.

대전권과 충청도의 중추도시다. 대전권은 한국 도시권 중 권역 내 교류가 제일 활발한 편인데 한 달에 한 번 대전광역시장, 세종특별자치시장, 충청북도지사, 충청남도지사들이 모여 간담회를 진행할 정도고, 네 자치단체끼리 서로 엄청나게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다. 특히 세종과의 관계가 밀접한 편으로 세종시 출범 이후 대전세종연구원을 설립하고 대전과 세종 협력 시범사업까지 자주 이뤄지고 있다. 대전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 중이지만 유출된 인구의 상당수는 세종이 흡수했기 때문에 대전권의 인구는 증가 추세에 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은 도시로 서울, 부산, 제주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2021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평가에서 삶의 질, 보건, 환경, 교통, 행정역량지수에서 1등, 재정과 행정이 포함된 종합부문에선 서울에 이어 2등이라는 쾌거를 달성할 정도로 지역 이미지는 대체로 좋은 편이다. 다만 살기에는 좋아도 이렇다 할 지역 특색이 적은 탓에 대표적인 '노잼도시'로 손꼽힌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지방자치 제도가 굉장히 잘 잡힌 도시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2022년 10월 세계지방정부연합총회를 개최했다. 140개국, 1,000여개 지방정부와 지방정부 협의체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2026년, 한국 대전광역시에서 세계태양광총회 개최가 확정되었다. 전세계 환경 재생에너지 관련 최대 행사로, 대전광역시에서 최초 세계태양광총회를 유치하게 되었다.

20대 거주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고 인구가 감소세지만 대부분이 인접한 세종과 충청으로의 전출이라 지방 광역시 중 가장 미래가 밝다.

대전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가까운 충청남도 공주시의 구석기 시대 유적인 석장리 유적과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용호동 유적이 있어 대략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되며, 청동기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청동기 유물, 집터, 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 중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농경문 청동기.

원삼국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에 속하는 곳이었으며, 마한을 이루던 소국 중 하나인 신흔국(臣釁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신흔국은 충청남도 서산시 혹은 예산군 일대로 추정되기도 하여 확실한 것은 아니다. 대전으로 비정하는 설에서는 보통 '신흔'이 종국에 진잠동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는 후술할 진현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지금의 유성구 일대에는 마한의 내비리국(內卑離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하단에도 서술된 유성구의 삼국시대 지명 노사지가 내사지(內斯只)로도 기록되었으며 두 지명은 내(內)라는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강역에 들어가 대덕구 읍내동 일대를 중심지로 하며 회덕동 일대를 포함하는 우술군(雨述郡)으로 등장한다. 이는 순우리말 지명 비술 또는 비수리의 한자 표기로, '비'를 뜻하는 雨(비 우)의 뜻 '비'와 述의 음 '술'을 가져온 것이다. 실제로 대덕구 장동에 위치한 계족산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산이 울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어 '비가 오는 봉우리'라는 뜻의 '비수리'라는 지명이 전래되어 왔다고 한다. 이 전설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술군의 산하에는 유성구 구성동 일대의 노사지현(奴斯只縣), 덕진동 일대의 소비포현(所比浦縣)이 있었고 서구 봉곡동 일대에는 진현현(眞峴縣)이 있었는데, 진현현만 유일하게 우술군이 아닌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을 중심으로 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의 산하였다. 성왕 대에 설치된 지방 구획인 5방 기준으로는 공주시 일대가 북방, 논산시 일대가 동방의 중심지였으므로 대략 이 둘 중 하나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는 대전 일대가 이후로도 주로 공주와 묶여서 움직였던 것을 고려하여 북방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 전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전에는 산성 유적이 많고, 산성이라기보다는 보루에 가까운 수준의 성곽 유적도 많다. 특히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위례성을 함락당한 뒤 장수왕의 연이은 남하로 백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는 고구려군이 대전 일대까지 진출해, 백제 웅진성이 동북쪽(세종)과 동남쪽(대전) 양면에서 압박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군이 남긴 유적은 서구 월평동, 세종 부강면, 새롬동, 나성동 일대에 있다.

이후 동성왕 대에 이르러서야 백제는 신라와 합세하여 대전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종 전체와 청주 및 대전의 대부분은 백제가 되찾았으나, 본디 한성백제의 강역이었던 괴산 전체와 오늘날 대덕구 북부 절반 및 청주 서남부는 별 수 없이 신라의 점유를 묵인해야 했다. 괴산은 의자왕 대에 백제가 신라에게서 수복했으나 신탄진권과 청주 서남부 일대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끝내 되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덕구 북부 지역은 백제뿐 아니라 신라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할 수 있겠다.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이던 660년 7월 9일 발발한 황산벌 전투 당시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성구 일대에 위치한 노사지현과 음운이 유사하여 같은 장소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대전 지역이 격전지인 황등야산군(논산)과 인접한 국경 지대이다 보니 신라군이 진을 치기 적합했을 것이다.

백제 멸망 이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부흥군이 661년 8월 전후로 신라군의 길을 막으며 항전했던 지역인 옹산성(甕山城)이 현 대덕구 장동 계족산에 있는 계족산성으로 추정된다. 이후 옹산성이 사흘 간의 포위 끝에 9월 27일에 함락되고 상주총관 김품일에 의해 우술군마저 공격당해 1,000여 명의 목이 베이자, 백제의 마지막 우술군 군장(郡將)인 2등 달솔 조복(助服)이 부장으로 보이는 3등 은솔 파가(波伽) 및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662년 8월에는 부흥군의 잔당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모여 진을 치고 저항하자 김흠순 등 장군 19명이 파견되어 이를 격파했다.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 9주 5소경 기준으로 웅천주(熊川州)에 속했으나 이후 757년 경덕왕의 한화 정책에 의해 우술군은 비풍군(比豊郡), 노사지현은 유성현(儒城縣), 소비포현은 적조현(赤鳥縣), 진현현은 진령현(鎭嶺縣)으로 개칭되게 된다. 진령현은 여전히 황등야산군이 개칭된 황산군(黃山郡)에 따로 속하고 있었다. 웅천주는 웅주(熊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900년대 초반 무렵 후백제의 강역에 들어갔다. 후백제의 판도는 백제와 비교하면 대전 동쪽으로 훨씬 멀리 뻗어 경상도로 깊이 침투해 있었으며, 종전에 신라가 차지했던 대덕구 북부 역시 수복한 상태였다. 때문에 당시 대전광역시 일대는 936년에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후백제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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