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4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중리에 위치한 Y전당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피해자는 전당포를 운영하던 화교 부부였다. 용의자가 좁혀졌지만 물증이 없어 18년이 지난 현재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제보전화는 (033)241-4599, 252-4599로 하면 된다.
2005년 8월 14일 12시 10분쯤 양구경찰서에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흉기에 찔렸는데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112순찰차 사이렌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양구읍 중리에 자리잡은 한 전당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전당포 주변은 순식간에 출입이 통제됐고 긴급 출동한 양구경찰서 소속 형사 5명은 현장 보존 및 정밀 감식에 들어갔다. 몇 시간 후 하얀 천이 씌워진 시신 2구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놀란 주민들은 “조용하던 동네에서 어떻게 이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인구 2만 4,000여명이 살던 양구군에서 2명이 함께 피살된 강력사건이 발생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양구 전당포 노부부 피살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 이후 마을에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피해자는 전당포 주인(당시 77세)과 아내(당시 69세)였다. 이들은 양구에 정착해 살던 화교(중화민국 국적자)로, 1975년부터 전당포를 운영해 왔다. 가슴 부위 등 12곳을 흉기에 찔려 숨진 주인은 전당포 안쪽 방에 있던 1인용 간이침대 위에 누워 쓰러진 채 발견됐고 아내는 출입문 안쪽 탁자위에 놓여 있던 간이금고 옆에서 숨져 있었다. 아내도 오른쪽 가슴 부위 등 3곳을 흉기에 찔리고 우측 눈 부위가 함몰된 상태였다. 온통 피로 물든 방바닥은 참혹했던 살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했다.
노부부를 처음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전당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아들(당시 45세)이었는데 전당포에서 잔심부름 등을 해 왔다. 그는 경찰에서 “사건 당일 오전 전당포로 출근해 한동안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정오쯤 찾아온 손님의 물품을 확인하기 위해 방안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시신 및 혈액 응고 상태 등으로 미뤄 숨진 전당포 노부부가 밤 사이 살해됐을 것으로 보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시신이 발견된 내실에 있던 장롱 안 물건이 흩어져 있긴 했으나 전당포 현관 및 창문 등에는 침입 흔적이 전혀 없었으며 숨진 노부부에게서 저항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숨진 주인 주변에 개봉된 약봉지와 알약이 떨어져 있었고 주민들은 “화교인 전당포 주인과 친하게 지내며 드나들던 이웃이 거의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외부인이 강제로 침입한 것으로 볼 만한 뚜렷한 정황이 포착되지 않자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형사는 “반항한 흔적이 없는 점으로 볼 때, 전당포 주인이 평소 복용하던 약을 먹으려다 아는 사람에게 갑자기 공격을 당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으며 “알약이 흩어져 있었다는 것은, 주인이 살해될 당시 잠들지 않은 채 깨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며 “범인이 잘 알지 못하는 외부인이었다면 방어를 하거나 반항한 흔적이 남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형사는 “방안에 있던 3개의 장롱 중에 피해품인 현금 1,000만원을 보관하고 있던 장롱만 뒤지고, 전당물은 그대로 놔둔 것을 보면, 아주 절친한 면식범에 의한 범행으로 충분히 의심되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이유로 수사대상은 자연스럽게 전당포를 자주 이용하던 단골손님과 숨진 노부부의 가족으로 좁혀졌다.
경찰은 전당포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노부부의 사건 당일 행적을 확인하는데 주력했다. 일부 가족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한편 법원으로부터 통신제한조치허가서를 발급받아 감청을 하기도 했다. 일부 유족이 진술한 행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소 시간대가 어긋나는 점이 발견되긴 했다. 하지만 부모가 숨져 황망한 상태에 빠진 가족들이 세부 시간대 별 일상생활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어 용의자로 특정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일부 가족들은 “부모를 잃었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며 경찰수사에 거부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경찰은 금전거래 과정에서 생긴 원한 관계에 초점을 맞춰 단골 손님이던 군인들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실제 사건이 발생한 전당포에 월급통장을 맡기고 돈을 자주 빌려 쓴 군인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고 노부부가 흉기에 수십 차례 찔리는 등 잔인하게 살해된 점도 금전거래에 따른 원한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했다. 경찰은 헌병대와 기무사의 협조를 받아 이들의 행적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인근 군부대에서 복무하던 현역 군인들은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탐문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전역 군인 2명을 용의선상에 올렸는데 2004년~2005년 사이 인근 모 부대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A씨와 B씨였다. A씨는 경찰에서 “2000년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동료가 전당포에서 200만원을 대출할때 연대 보증을 섰다가 대신 갚은 이후 전당포와 채권·채무관계가 없었다”고 진술했지만 이같은 진술과 달리 숨진 노부부는 A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다. B씨도 부대에서 근무할 때 동료의 연대보증을 섰다가 자신의 월급이 압류당하자 2001년 노부부에게 500만원을 대신 갚은 전력이 있었다. 이를 포착한 경찰은 검찰에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 허가신청’을 해 사건 당일 이들의 휴대폰 통화 위치 등을 확인했으나 이렇다 할 용의점은 찾지 못했다. 양구경찰서뿐 아니라 강원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까지 총동원돼 3개월 가량 저안망식 확인작업을 벌였는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경찰은 유족이자 최초 신고자인 아들을 의심했는데 아들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후 경찰은 증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한 줌의 의심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설득 끝에 경찰은 사건 발생 4년 만인 2009년 아들을 상대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진실' 반응이었다. 이 일로 아들은 비로소 경찰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