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성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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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야구선수 출신의 사업가 이호성이 자영업자인 내연녀와 그녀의 세 딸, 총 4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 살인 과정, 시신 처리에 대한 증거는 이호성이 진범임을 입증할 만큼 많이 남았으나 이호성이 체포되기 전에 아무런 진술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동기가 불분명하다.

2001년에 은퇴한 이호성은 자신의 이름을 딴 웨딩홀인 "호성웨딩홀"을 운영하면서 잘 나가는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 응했던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시절엔 1년에 10억 가까이 벌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였다고 한다. 실제로 장성호를 비롯한 KIA 타이거즈 선수들 여럿이 이 곳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약 3년여간 사업을 하였고 한때는 지방에 2호점, 3호점까지 내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이호성은 웨딩홀 하나만으로는 만족을 못 했는지 2005년에 실내 스크린 경마장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무려 110억 원 이상의 부도를 내면서 실패했고 기존의 웨딩홀도 접었다. 전라남도 순천시에 6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을 짓고 분양 사업을 시도했는데 한국마사회에 '경마장 장외발매소' 모집공고에 신청하여 허가도 따냈다. 이렇게 모든 사업이 순탄하게 흘러갈 예정이었으나 사업 허가가 돌연 취소되었다. 이유는 시민단체들이 '교육도시 순천에 사행성 업소가 웬말이냐?'라고 대대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 행정 수도 부동산 개발 관련 사기 혐의에까지 얽히면서 구속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여전히 많은 빚이 남아 있는 상태로 여러 지역들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정도 깨졌다.

그 과정에서 이호성은 2명의 여자와 사귀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피해자 김연숙(45)은 은평구 갈현동에서 참치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호성과는 2년 동안 교제해 왔는데 그녀의 전 남편은 우울증으로 오랜 기간 사이가 좋지 않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이 생활하다가 우울증이 심해져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호성이 살인범으로 지목된 뒤 경찰은 김씨의 남편의 죽음도 혹시나 자살이 아니라 이호성이 관여한 타살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조사했지만 이호성이 자살하면서 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미스테리로 묻혔다. 김씨의 주변인들은 김씨가 사별 직후부터 이호성을 주위에 소개했으며 두 사람의 결혼까지 생각하던 사이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호성은 일산신도시에 살던 차모 씨와도 사귀고 있었는데 차씨와는 2007년 8월부터 만나 2007년 12월부터 동거했다고 한다. 

2008년 2월 15일 이호성의 내연녀 김씨는 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며칠 후에 낼 전세금의 잔금 1억 7천만 원을 현금으로 인출한 후 5개 은행에 3천만 원~5천만 원으로 나누어 예치하였다. 이 장면은 CCTV로 잡혀서 확인되었으며 김 여인은 은행에서 나와 흰색 르노삼성 SM5 조수석에 타고 떠났는데 이호성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월 17일 오후 5~6시경 김 씨의 둘째딸(19), 셋째딸(13)이 귀가하였다.

2월 18일 0시 10분 정도에 이호성의 내연녀 김씨는 퇴근하면서 횟집 종업원들에게 "며칠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고 김 씨의 딸 세 명도 18일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2월 18일 오전 김씨는 5개 은행에 분산 예치했던 1억 7천만 원을 모두 인출하였다.

오후 4시~5시 정도에 김씨가 거주하던 서울 마포구 창전동 금호아파트에 김 씨 소유의 르노삼성 SM5 승용차를 주차하는 남자가 목격되었다.

이날 불상의 시각에 이호성은 마포구에 있는 김씨의 아파트에서 김모 씨 일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국과수의 조사 결과 김씨와 둘째딸, 셋째딸은 경부 압박 등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오후 9시 14분~56분경 CCTV에 찍힌 영상을 보면 한 남성이 카트를 끌고 김 씨의 아파트로 들어와서 5차례 드나들면서 대형 가방을 실어나갔다.

이날 밤 11시~12시경 김씨(의 휴대전화)와 그녀의 딸이 통화한 기록이 발견되었고 밤 12시에는 종로 일대에서 김씨의 핸드폰과 큰딸의 마지막 통화가 기록되었다.

이호성은 밖에 있던 큰딸을 김씨의 핸드폰으로 불러내 밖에서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국과수 수사결과 첫째딸의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 골절, 뇌출혈로 인한 머리 손상으로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이호성이 살해한 네 모녀를 보면 큰딸만 외출복 차림이었고 나머지 세 모녀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큰 딸은 사건 당일 학교에서 뮤지컬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2월 19일 새벽 4시 40분 김씨의 큰딸 휴대전화가 전남 화순의 한 기지국에서 잡혔다. 오전 7시 19분에는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장성나들목 구간의 자동판독기의 CCTV에서 김씨의 흰색 SM5 승용차가 잡혔다.

오전 9시~11시 이호성의 의뢰를 받은 인부들이 화순군에서 구덩이를 팠다. 이 과정에서 이호성은 인부들을 화순군 번화가에서 만났고 인부들에게 연장을 미처 못 챙겨왔다면서 연장을 화순군 번화가에서 사갖고 갔다.

이호성은 자신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묘소(교회 공동묘지)로 가면서 인부들에게는 교회 표지석을 설치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이유로 자신의 부모 묘소 근처 길가에 가로 100cm, 세로 200cm, 깊이 150cm 정도 되는 구덩이를 파 달라고 시켰다.

인부(사건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차 2대로 이동했으며 그 중 흰색 승용차는 이호성 혼자만 타고 차 근처에 얼씬거리지조차 못하게 했는데 말로는 "짐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탈 공간이 없다"고 했지만 정작 조금이라도 그 흰색 승용차에 접근하면 아주 죽여버릴듯이 매우 살벌하게 노려봤다."고 한다. 그런데 인부는 그 흰색 승용차에 이상하게 자석요 가방이 많이 들어있었는데 속으로 '뭐하는 사람이길래 저렇게 검정색 자석요를 많이 갖고 다니지?'라며 의아해 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이호성의 의뢰에 의해 2시간 동안 이호성이 원하는 대로 구덩이를 파줬으며 이에 이호성이 인부들에게 일당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큰 돈을 수고료로 주고 인부들을 귀가시켰다.

오후 12시 정도 SM5 승용차가 화순군을 벗어나는 것이 CCTV에 찍혔다. 이호성은 피해자들을 암매장한 다음 화순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오후 2시 정도 이호성은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에서 평소 알던 지인 이모 씨에게 현금 5천만 원을 전달하고 그 돈을 자신의 형에게 입금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4시 정도 김씨의 휴대전화로 그녀가 운영하던 식당의 주방장에게 '주말에 식당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2월 20일 오후 6시 18분 김씨가 살던 아파트에 누군가 그녀의 차를 주차해 놓고 나갔다. 이 CCTV의 영상에서 이것이 이호성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생겼고 공범 유무에도 혼란이 생겼다.

2월 20일, 김씨의 오빠는 김씨의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하기 시작했고 2월 24일에는 김 씨, 김 씨의 딸 모두와 핸드폰 통화를 시도했으나 모두 불통이었다.

2월 26일 김씨의 오빠가 여동생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지구대 경찰에 연락하여 아파트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서 확인을 하였다. 거실 형광등이 깨진 점이 수상하기는 했지만 집이 워낙 잘 정돈된 상태고 컴퓨터도 켜져 있어서 별다른 의심 없이 돌아갔다.

3월 3일, 김 여인의 딸들이 학교 개학 날짜가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두절되어 있었으며 식당에 찾아가도 종업원들에게 사장님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은 김 여인의 오빠는 결국 경찰서에 4모녀의 실종 신고를 했다. 실종 신고가 들어오자 경찰은 수사를 시작하고 김씨의 아파트의 CCTV에서 이상한 화면을 포착했는데 검은색 옷에 모자를 눌러 쓴 한 남자가 김씨의 가족이 실종된 날이라고 생각되는 날 아파트 1층에서 큰 검정색 가방 3개를 연달아 손수레로 실어나르는 장면이었다.

경찰은 김씨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김씨의 남자 관계를 수사하여 전 해태 타이거즈 이호성 선수와 가까운 사이라는 증언을 얻었다. 이호성을 아는 사람들에게 CCTV를 보여준 결과 CCTV에 나온 사람의 뒷모습이나 걸음걸이가 이호성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피의자는 이호성일 것이라는 쪽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다.

3월 7일, 이호성에게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3월 8일, 언론에 유명 야구선수가 4모녀 실종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호성이 일산 경마장에서 차 여인과 자주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이호성은 차 여인에게 돈 4천만 원을 주기도 했다. 차 여인과 이호성은 이호성이 자살하기 전까지 31시간 동안을 함께 보냈다.

경찰은 이호성을 용의자로 지목한 후에도 이를 철저히 비밀로 한 채 수사를 진행하였지만 SBS 취재진도 모종의 경로를 통해 용의자가 이호성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단독 보도를 준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 수사팀은 SBS를 찾아가 범인 검거가 임박했으니 보도를 조금만 미뤄 달라고 요청했으나, SBS 측은 이를 거부하고 범인이 이호성이라고 단독 특종보도를 했다.

결국 보도 다음 날 이호성은 자살하였고 이후 경찰 수사담당자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경찰 수사가 조금만 빨랐거나, SBS 보도가 조금만 늦었다면 이호성이 살아있을 때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운 마음을 밝히기도 했다.

어차피 이미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였고, 아직 이호성은 수사 중이란 사실도 몰랐기에 공개 수사는 최대한 늦출 필요가 있던 상황이었다. 용의자라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면 잠적하거나 자살을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호성은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4번 타자로서 선수들의 노조격인 선수협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인사였던지라 공개수사로 전환되면 이 좁은 한국에서 숨을 곳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극단적인 궁지에 몰려 자살을 할 리스크가 있었다. 굳이 언론에서 일찌감치 터뜨려야 할 공익적인 목적이 없었음에도 특종이라며 성급히 터트려버리는 바람에 한국에서 도망칠 곳이 없는 이호성이 자살을 해버려 이 사건은 물론 함께 수사해야할 동업자 실종 문제까지 모두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2008년 3월 9일 이호성은 늦은 밤 성수대교에서 차 여인과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호성은 차 여인을 택시로 보내고 그대로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3월 10일에는 마침내 공개수사로 돌아섰고 김 씨의 은행 계좌를 압수수색하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10일 마포 일가족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의해 공개 수배령이 내려졌다. 당시 현상금은 300만 원. 

공개수배된 지 몇 시간 만인 2008년 3월 10일 오후 3시 8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반포대교 남단에서 400미터 떨어진 한강 한가운데에서 이호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향년 40세. 처음에는 신원 미상이었으나, 나중에 지문 감식을 통해 이호성으로 밝혀졌다. 투신자살로 추정되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망 원인을 익사라고 발표했다. 이송단의 한 요원이 언급하길 이호성의 시체는 마치 한이 맺힌 듯 끔찍하게 무서운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호성의 시체가 한강에서 발견된 지 약 8시간 만인 같은 날 저녁 11시에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새로운 제보가 들어왔다. 이호성으로 보이는 사람의 부탁으로 전남 화순군 동면 공동묘지 근처에 비석을 세울 구덩이를 파 줬다는 제보였다. 경찰이 즉시 현장으로 가서 그 구덩이를 찾아내 파서 확인한 결과 구덩이에서는 모녀가 사라진 날 이호성이 아파트 1층에서 가지고 나갔던 4개의 가방이 발견되었고, 가방 안에는 한 가방에 한 구씩 시체가 두꺼운 비닐에 싸여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엄마와 둘째, 셋째딸은 평상복 차림, 큰딸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일각에서는 이호성이 피해자들을 죽이기 전에 강간하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름끼치는 것은 시신들 위에 80kg에 이르는 커다란 바윗돌이 눌러져 있었다고... 인부의 제보가 없었다면 하마터면 영원히 피해자들을 찾지 못할 뻔했다.

2008년 3월 13일, 서울 삼성동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에서 피해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피해자의 친외가 친척들, 친구와 선후배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애통해 했지만 사람을 4명이나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겁한 방법으로 최후의 도피를 한 가해자 이호성의 빈소에는 몇몇 선후배 선수들과 지인 등 조문객이 극소수밖에 오지 않았으며, 조화 역시 한 개도 오지 않았다. 소수의 유족들도 기자들의 방문을 애써 막고 작은 방으로 가서 본인들끼리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 심지어 당일 장례식장의 장례 명단에서도 이호성이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서고 전혀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건 이호성의 유족들과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조용히 재빨리 끝내려고 일부러 이름 석자를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현역 시절의 화려한 명성이 무색하게 살아생전의 동료와 팬들에게 외면받은 채로 초라한 장례식을 맞이한 뒤 광주영락공원에서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자살하기 전 편지 형식으로 몇 가지 유서를 남겼는데, 형에게 보낸 유서에는 "어머니와 형, 아내, 아이들에 미안하고, 특히 아들을 잘 챙겨달라"는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인(광주시 야구협회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야구협회장을 축하하고 옛 시절이 행복했다. 하늘나라로 먼저 가 있을게"라고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을 적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피해자들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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